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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나바위 성당,김대건 신부 착지처

♥사랑 2018. 12. 23. 15:28

김대건 신부 착지처

익산 나바위 성당

                                                                                                                      사적 제318

나바위 성당은 1897년 본당을 설립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베르모렐(장약슬 요셉) 신부가 1906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1907년에 완공하였다. 성당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아넬,신부가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다. 건축양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으로 택하였다.

그 후 1916~1917년 흙벽을 서양식 벽돌로 바꾸고, 용마루 부분에 있던 종탑은 헐고 성당입구에 고딕식

종탑을 세웠다. 또한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꾸고, 1922년 회랑기둥을 반석조로 개조하였다. 특히 성당

내부에는 전통관습에 따라 남녀 자리를 구분했던 칸막이 기둥이 남아 있다. 바위 성당은 서양식 성당

건축 양식과 한국의 전통적인 목조건축 기법이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서 우리나라 근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7

국가 사적 318호로 지정되었다.

성당 서북쪽 화산 언저리는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중국에서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신자들과 함께 입국할 때 첫발을 디딘곳이다.

때는 184510128시였다.

이 성당은 한때 '화산성당'이라고 불렀으나 1989년 부터 본래 이름대로 부르고 있다.

 

나바위 성지 이정표

오른쪽 발모양의 화강석 이정표는 성 김대건 신부 일행이 첫 발을 디딘 축복의 땅을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25대 주임 엄기봉신부가 부여군 임천에서 구입하여 세웠다


본당

본당


본당 및 사제관

본당 출입문

바위 치유의 경당

건물의 역사와 의미

1956년에 건축된 이 건물은 당시 진료소와 성당의 강당으로 사용되었다. 성 바오로회 수녀님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이 진료소는 단순히 약을 나누어 주는 시약소의 단계를 넘어 소규모 의원에 못지않은

의료기구를 갖추고 있어 간단한 수술까지도 가능했다고한다.

따라서 당시 진료소는 이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는 것은 물론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역한도 함께 하여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육체적 치료와 마음의 치유 또한 주었던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라 하겠다.

훗날 보수작업을 통해 1층은 개인 피정의 장소로, 2층은 본당의 강당으로 사용되었고, 2016년에 성지

재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2층 강당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현재의 치유의 경당"으로 새로 나게 되었다.

이로써 건물의 역사와 정신이 다시 살아난 "치유의 경당"은 이제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치유와 위안을 주는 장소로써 그 역할을 하고 있다.


"ECCE HOMO” 성상과 종탑의 새벽 닭

경당 입구 오른쪽에 있는 예수님 성상은 대 데레사 성녀가 영적갈등을 겪고 있을 때 회심케 한 성화

"ECCE HOMO"를 성상으로 만든 것이다.

많은 유명 작가들이 그렀던 "ECCE HOMO” 성화는 사형 선고를 받고 기둥에 묶인 예수님을 그린 것으로,

당시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상처가 난 몸에 가시관과 자주색 옷을 두른 다음 군중 앞에 선 예수님을

두고 빌라도가 "자 이 사람이오! (ECCE HOMO!)"라고 말한(요한 19,5)내용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따라서 강당에 들어가는 순례객은 예수님의 공로를 통하여 인간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치유를 칭하는 것이다.

한편 경당의 종탑 위에 세워진 닭의 모양은 베드로의 배신과 회심을 상징하는 "새벽 닭"으로 예수님께서

네가 새벽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 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과 세 번의 부인 후 자신의 잘못과

나약함을 깨달은 베드로의 눈물어린 회심을 상징한다.

"새벽 닭을 치유의 경당 꼭대기에 세운 것은 순례객이 경당에 들어가며 나약한 인간이기에 세상에서 범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상처와 아픔을 자비로우신 예수님께 맡기고그

안에서 치유를 청하기 위함이다.



경당에 들어 가며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역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짐어자셨다마태복음 8:17

구세주 에수님, 당신의 수난의 공로로 이곳을 찾는 이들의 병고를 낫게 하시고 상처받은 영혼에 치유를

허락하소서

본당 사무실 앞 예수님

성체 조배실

이곳은 나바위 성당 초창기(1900년대 초)에 신부님들께서 불을 때던 아궁이가 있던 곳이면서 외국 선교사

신부님들이 직접 빵을 구워 드셨던 사제관 식당 자리입니다. 또한 신부님들께서 직접 제병(성체성사에

사용 하기 위해 누룩없이 만든 둥근 빵을 만드시던 의미 있는 곳이기도합니다. 이처럼 나바위 성당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몸소 고난의길을 걸으며 헌신했던 초대 신부님들의 고귀한 정신이 깃든 곳입니다.

조용히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과 일치를 이루며 주님과 만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매일 오전(  )~ 오후 ( )

 성체조배실 출입 시에는 성체께 최대한예의를 갖춰야 하며조배실에서는 침묵을 지키셔야합니다.


피정의 집

나바위와 하나님의 섭리

김대건 신부님 성상

본당 오른쪽 길을 따라 화산(나바위)

정상으로 향하면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자리하고 있다. 이 성상은 김대건 신부의 고귀한 순교정신과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2007년 어느신자 부부의 봉헌으로 세워졌다

 


나바위의 이야기

평화의 모후

나바위 성당을 돌아 화산으로 올라가면 그 초입에 넓은 성모동산이 있고, 평화의 성모님이 서 계신다.

그 자리는 전라북도 삼대 명당자리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초대 주임 베르모렐 신부님께서 본당을 설립하고, 성당을 짓기 위해 준비하던 중,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화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암자 하나와 그곳에 살고 계신 스님이었다.

암자가 있는 상태로 성당을 지을 수는 없어, 고민 끝에 하루는 스님을 찾아가 성당을 지으려는 뜻을 밝히고

이곳에서 나가 주시기를 정중히부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 나왔고

하루하루 기도로 보내셨다.

그러던 중, 두 세 달 지난 어느 날, 스님께서 바랑을 짊어지고 신부님을 찾아와 하시는 말씀이,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나니 이 화산과 암자는 신부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뜻밖의 일에 놀란

신부님은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수소문 하셨고,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신부님께서 스님을 찾아간 그 다음날부터 스님의 꿈에 왠 여인이 나타나서 "이 자리는 내 자리이니

이곳에서 빨리 나가거라~" 하며 매일같이 스님을 괴롭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1960년대 본당 성심회에서 힘을 모아 성모님을 그 자리에 모셨고, 지금도 성모님은

높은 곳에서나바위 성당을| 굽어보시며 우리들의 기도를 전구해주고 계신다

평화의모후시여, 저희를 위하여빌어주소서  


망금정을 향하여 한발 한발 가벼웁게 계단을 오름니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탑

1955년 김대건 신부 시복 30주년을 맞아 나바위 본당 신자들의 헌금과 협심으로 세운 기념탑이다.

탑의 크기는 김대건 신부 일행이 타고 온 라파엘호(길이 25, 넓이 9자자 깊이 7)를 연상하며 암반

위에 제작하였다. 탑에 사용한 돌은 신자들이 화산 서쪽 기슭에 있던 큰 암석을 깨어 목도로 옮겼다


망금정(望錦亭)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주교는 1912년부터 매년 6월에 화산 정상인 이곳에서 금강을 굽어

보며 피정을 하였다. 당시 전라도교회는 대구교구소속이었다. 1915년 베르모렐 신부는 주교의 피정

을 돕기 위해 정자를 짓고, 드마즈 주교가 이 정자를 망금정이라 이름 하였다고 합니다.


망금정 천정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예수님께 찾아온 마리아

장사되신 예수님

망금정에서 내려본 모습


망금정에서 내려본 성당

성당 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