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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전라도 여행

전라감영지

♥사랑 2021. 1. 5. 02:05

전라감영지

전라감영은 조선 초부터 1896년까지 약 500년 동안 지금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제주도를 관할하던

감사(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전라감영은 정문인 포정문, 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

감사의 주거 공간인 연신당, 감사가족의 처소인 내아, 누각인 관풍각 등 건물이 모두 40여 채가 있었다. 1896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라감영은 전라북도도청의 행정업무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감영 건물대부분은 근대화 과정에서 없어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선화당도 1951년에

폭발 사고로 불타 버렸다.

이곳은 조선시대 전라도 행정의 중심지였으며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총본부 대도소가 설치된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2015년에 옛 도청 건물을 철거하고, 2017년부터 전라감영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선화당, 연신당,

내아 관풍각 등을 복원하였다.

선화당

선화당은 전라감사의 집무처이다. 선화당이라는 당호는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친다'

승류선화(承流宣化)에서 나온 말이다. 1597(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그 이듬해 1598

전라감사 황신이 중건하였으며, 1771년에 전라감사 윤동승이 개건하였다. 이후 1792(정조 16)

화재로 소실되어 전라감사 정민시가 다시 중건하였다. 선화당은 광복후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한국전쟁 중 1951년 경찰청 무기고로 쓰이던 도청 문서고에서 로케트탄이 폭발하여 도청 본관과

함께 소실되었다. 선화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약 78평에 달하는 큰 건물이며,

전주부성내에서 객사 다음으로 컸다.

측우기와 측우대 , 우물, 가석과 패석

구 전라북도청사의 흔적

이곳은 조선시대 전라감영과 1921년에 신축된 도청사, 1952년에 신축되어 2005년 신도심으로

이전할 때까지 전북도청이 자리했던 공간이다. 고려시대 전주목, 객사 명문 와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치소(관아가 있는 곳)도 여기에 자리했을 개연성이 크다. 여기에서

통일신라 때 건물터와 유물들도 발굴되었다. 전라감영지는 통일신라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치소로서의 역사가 중첩된 역사성 깊은 곳이다.

관풍각(觀風閣)

관풍각은 선화당에 이어 감사가 정무를 처리하는 제2의 정청이며, 감사가 쉬기도 하고

연회의 장소로도 사용했다. 관풍각 이라는 이름은 감사의 직무인 '풍속과 민정을 살핀다'

관풍찰속(觀風察俗) 에서 유래하였다. 선화당과 관풍각 당호는 감사의 직무를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선정비

선정비란 선정을 베푼 관리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그렇지만 조선말에는

선정비들이 으레 세워졌고 억지로 세워지기도 하였다. 조선말에는 전라감영 건너편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가 다가공원쪽으로 옮겨졌으며, 2020년 감영을 복원하면서 감영 경내로 이전하였다.

관찰사 18, 판관 5, 중영장·별장영의정 · 암행어사 각 1기로 총 27기의 선정비가 있다.

내아와 행랑

내아는 전라감사 가족들이 거쳐하는 안채로 선화당 북쪽에 위치하였다. 19세기 완산부지도

내아가 ''자형 건물로 그려져 있다. 발굴조사에서 3동의 건물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3차례 개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신당

연신당은 전라감사의 처소이다. 1688(숙종 14)에 전라감사 이유가 창건하였다. 연신당이라는

이름은 논어” “술이편'공자께서 집에서 쉬고 계실 때는, 마음이 온화하고 너그럽고

즐거우신 듯 보였다(子之燕居 申申如也天天如也)’에서 나온 것이다. 감사가 편히

쉬는 처소임을 의미한다. 경상감영은 징청각(澄淸閣)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