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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통영케이블카, 통영 강추 1번

♥사랑 2018. 10. 26. 13:54

설렘과 감동이 넘치는 통영케이블카

10월23일(화) 경남 투어를 계획하고 오전 9시20분 통영케이블카 주차장을 입력하고 집을

출발하였습니다. 가는 길은 우리를 마중나온 것처럼 곳에 따라 간간히 비가 내렸습니다.

통영에 도착하니 전형적인 화창한 가을 날씨였습니다

  케이블카탑승권을 매표하고 점심식사는 45년 전통의 명가충무김밥이 운영하는 직영점에서 돈까스

2인분을 주문하여 맛있게 식사하고 케이블카를 탑승하였습니다 .

통영케이블카는(선로1,975m)는 도남광광지 하부정류장에서 시작하여 미륵산 8부 능선에 위치한 상부정류장까지 8인승, 47대의 자동 순환식 곤도라가 광광객을 수송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인 미륵산 정사에 오르면 한산대첩의 역사적인 현장과 한려수도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오며 일본 대마도, 지리산 천왕봉, 여수돌산도까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맛있게 식사 하였던 등심 돈가스 9,000*2= 1,8000원 입니다

운행 시간  동절기 : 동절기 (10월~2월)  평일 09:30~16:00  하절기    . 주말 .공휴일 09:90~17:0







한려 수도 조망 케이블카는 한국의 100대 명산(산림청 선정)중 하나인 통영 미륵산 (해발461m)에

설치된 국내 최장 (1,975m)의 케이블카입니다.

8인승 곤도라를 타고 미륵산 정상에 오르면 한려수도의 보석같은 섬들과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항, 이순신 장군의 구국의 혼이 서린 한산대첩지 등을 한눈에 조망할수 있으며, 맑은 날씨에는

 일본 대마도, 지리산 천왕봉, 여수돌산까지 볼수 있습니다.

상부정류장에 도착하시면 약 400m길이 (10~15분 소요)의 산책 데크가 미륵산 정상까지 설치되어

있어 등사객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당포해전 (唐浦海戰)

이순신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수군(26척)은 1592년 5월 29일(음력, 이하동일) 최초로 거북선을 취역시켜 사천해전에서 왜 전선 13척을 격침시켰다.
6윌 2일 오전 8시에 척후선으로부터 당포(미륵도 삼덕 리)선창에 왜선이 와 있다는 정보를 받고 급히 달려가 보니 왜 선적 21척이 선창에 정박해 있었다. 약 100이 명의 적들은 벌써 성인에 들어가 분탕짙을 하고 있었고, l00여명은 성 밖에 몸을 숨기고 조선함대를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조선함대는 거북선으로 적의 대장이 타고 있는 층루선에 돌진하여 현자포를 치쏘아 박살을 내고 먼저 대장을 죽인 다음그 여세를 몰아 전선을 향하여 각종 총통을 비오듯 쏘아 적선21척을 모두 격침시켰다
이날  죽은 적장은 왜국에서도 악명 높은 무라카미 해적의 후에 쿠루지마 미지 유키(來烏通之)였는데 의 동생 쿠루지마 미끼후사도 5년 후 형의 복수를 하곘다며 울돌목해전에서 자청하여 선봉을 섰다가 그마저 이순신에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해적형제였다
 당포해전은 거북선의 우수성이 입증삔 전투인 동시에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분쇄하는 첫 신호탄이었고, 한 달 뒤 [한산해전]은  그 마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당포- 조선 함대 정보활동과 작전의 중추기지
○ 1592년 5월 6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당포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만나 석의 소재에 관한 정보를

    얻고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기습공격으로 승리.
1592년 6월 2일 탐망선으로부터 정보를 입수, 기습공격으로 당포의 왜적 격멸 그날 전투 중 외양에서

     적선이 접근한다는 정보를 입수, 즉각 대응 위기 모면
1502년 6월 4일 당포의 토병 강탁으로부터 패퇴한 왜적의 1차 이동에 관한 정보를 입수.
    그날 전라우수사 이억기함대와 당포에서 만나 연합함대를 구성, 6월 5일 당항포해전에서 승리.
1592년 7월 7일 당포 사람 김천손으로부터 적선 70여척이 견내량에 와 있다는 정보를 한발 앞서 입수.
     7월8일 한산해전에서 대승함으로써 왜군의 수륙병진 전략에 쐐기를 박고 전세를 역전시킴.

※  당포성-고려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소된 길이 732m의 성곽
























한산대첩( 閑山大捷)

  1592년 4월 13일(음력, 이하 동일) 약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신무기 소총을

앞세우고파죽지세로 북상하여 불과 20일 만에 한성(서울)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왜 수군은 옥포·적진포·

사천·당포·당항포 해전에서 조선의 이순신 함대에게 연전연패 당함으로써 그들의 [수륙병진작전] 은

와해의 위기에 봉착했다.
   이순신 함대를 제압하지 않고서는 이 전쟁에서 승리 힐 수 없다고 판단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는 육전에 투입했던 수군장 와키 자카 야스하루偏坂安治)·쿠키 요시 타카(九鬼嘉隆).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들에게 수군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이순신 함대를 격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6월 15일 김해에 집결하여 작전회의를 마친 이들 성규수군장들 가운데 와키 자카는 7월 7일 73척의

선발 함대를 이끌고 오후 2시경 견내량에 도착하여 후발 함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당포(미륵도 삼덕리)사람 김천손이 이 상황을 목격하고 그날 저녁 때 당포에 도착한 조선 연합함대

로 달려가 이 사실을 전하였다.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 연합함대(55척)는 이 황금 정보를 토대로 빈틈없는 작전을 세우고

다음날(8일) 새벽 견내량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왜 척후선 2척이 우리 함대를 보고 본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뒤쫓아가 적세를 확인해 보니 크고 작은 전선 73척이 결진하고 있었다.
견내량은 수로가 좁은데다 물살이 거세고 암초가 많아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이 작전하기에는

불리한 점이 많으므로 판옥선 5-6척을 투입하여 넓은 바다로 유인작전을 펼쳤다. 와키자카 함대가

유인작전에 말려 한산도 앞바다로 나오자 방화도와 화도 뒤에 매복해 있던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짓쳐

나와 학익진으로 왜 함대를 에워싸고 대장선을 향하여 지자, 현자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며 왜군의

지휘체계를 무너뜨렸다. 도망가는 척하던 유인선도 추격하던 왜선의 정면에서180°회전하여 왜의

선봉선에 집중포화를 쏟아부어 순식간에 침몰시키니 왜 함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조선수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하루 종일 쳐부수어 왜선 73척 가운데 59척을 깨뜨리고 왜장 2명과 왜

수군 8천여 명을 수장시키면서 세계 해전사에서 보기드문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 해전의 승리가 임진왜란 전국의 분수령이 되었으며, 히데요시는 이후 조선수군과의 해전을 전면

금지시킴으로써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왜군의 침략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했던 나라를 구하는

결정 적인 계기가 되었다.













설렘과 감동이 넘치는 통경케이블카

우리 나라 100대 명산인 미륵산 정상에서 한산대첩의 여사적 현장과

한려 수도의 비경을 한눈에 볼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