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죽게 될 운명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죠. ‘우리’의 범주에는 분명
나 자신도 포함돼 있습니다. 이를 머리로는 이해하며 인정하지만 심장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게 어찌
그리 어려운지요.
나의 작은 실수나 탐욕, 불의가 드러나면 온 마음과 온 영으로 갈등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작은 실수나 탐욕, 불의가 드러나면 온 마음과 온 영으로 갈등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혹여 누군가 연약하고 부끄러운 내 진면목을 들춰낼 것 같으면 더욱 분노하며 갈등합니다. ‘내 실수가 뭐
그리 대수라고, 내 욕심이 뭐 그리 크냐, 내 불의와 죄가 남들과 다를 바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훌륭한 분들이 “자아가 살아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면 될 것을,
훌륭한 분들이 “자아가 살아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면 될 것을,
다 내어 달면 될 것을, 아직 고집스러운 자아가 살아있고 살아남은 탓입니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그 또한 양심이 살아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심어 놓으신 선한 성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갈등 또한 유익입니다. 땅 딛고 사는 우리 모두 죄인이듯 우리는 갈등을 통해 성숙해 갑니다.
그러므로 갈등 또한 유익입니다. 땅 딛고 사는 우리 모두 죄인이듯 우리는 갈등을 통해 성숙해 갑니다.
더불어 믿음으로 주의 영을 영접하면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안성국 목사(익산 평안교회)
안성국 목사(익산 평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