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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경기전, 어진 박물관,

♥사랑 2018. 9. 26. 16:15

경기전

  사적 제 339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건국자의 초상이며, 경기전 또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지방의 진전이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

  진전(眞殿)은 어진을 봉안한 궁전을 일컫는다.

   조선은 건국 후 이를 기념해 1410(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경기전은 1614(광해군 6)에 중건한 것이다. 경기전 경내에는 진전 동편으로조선왕조실록

  을 보관하던 전주사고가 있고, 구이 태실마을에서옮겨온 예종대왕 태실이 있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태조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가 동북면 쪽으로 이주해

갈 때까지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후 이를 기념해 전주에 경기전을 건립하고 여기에 태조 어진(초상화)봉안하였다.

경기전(慶基殿)이라는 이름은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이다.

전주는 조선왕실의 고향이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경기전을 비롯하여 조경묘와 조경단, 오목대와

이목대 등 많은 왕실 유적들이 있다.


경기전 정문

경기전 안내도

경기전 정문 왼쪽 안내도

경기전 정문 앞 하마비

   조선시대에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이 비앞으로 지나갈때에는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뜻을 

새긴 표석이다.

  왕, 장군 또는 벼슬이 높은 유명한 성인들의 태생지, 신당 앞에 세웠으며 경으를 표하는 뜻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다. 이곳 경기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이기에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는 뜻으로 지자개하마 잡인무득불 이라 새겨져 있다

경기전 하마비는 1514년(광해군6)세웠으며 1856년(철종7)에 중각하였다.


경기전

   정전의 한가운데 감실을 두고 여기에 태조어진을 모셔놓고 있다. 청룡포를 입고 있는 전신상 어진으로 건국자의

위엄이 서려 있다 1872년 고종 9년에 새로 모사한 어진이며, 구본은 초상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항아리에 담아 진전 북쪽에 묻었다. 태조 어진을  봉안한 감실 안에는 습기와 냄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기 위해 부용향을 담은 붉은색의

향주머니를 넣어 두었다.

 감실 앞쪽에 어진을 호위하는 운검  한 쌍을 세워 두었으며 정전 좌우면으로는 용선, 봉선,홍개, 청개,등 의장물을

배치하였다

태조어진의 수난과 보존

조선시대에 태조어진이 많게는 26점까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에 봉안한 태조어진이 유일하다.

전란과 화마의 위기 속에서도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민들이 사력을 다해 수호한 결과이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전 태조어진을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정읍 내장산으로 이안하여

1년간 수호하였다. 이후 어진을 아산객사로 이안했다가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봉안하여 화를 면하였다.

  정해년 대화재 1767(영조 43) 정해년에는 전주에 큰 불이 일어나 민가 1천여호를 불태우고 불길이 경기전에 미치자

태조어진을 향교 명륜당으로 이안하여 화마를 피하였다.

  동학농민혁명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전주성이 전란에 휩싸이자 태조어진을 위봉산성으로 이안하여 화를

면하였다. 위봉산성은 유사시 태조어진을 수호하기 위해 숙종 때 수축한 성이다.

태조어진의 전주 봉안

   조선왕조는 건국 후 태조어진을 한양을 비롯해 고구려의 수도 평양, 신라의 수도 경주, 고려의 수도이자

태조가 살았던 개성, 태조의 출생지 영흥, 태조의 본향 전주 등 모두 6곳에 봉안하였다.

  전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한 것은 조선초인 1410(태종 10)으로, 경주 집경전의 태조어진을 모사하여 모셨다. 조선왕조는 건국자인 태조의 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여 이곳이 왕실의 고향임을 분명히 하였다.

   현재의 태조어진은 1872(고종 9)에 새로 모사한 것이다. 조선초의 태조어진은 너무 오래되고 낡아서 그림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경기전 북계상(北階上)에 묻었다.

  

조서왕조실록과 전주사고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본 실록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대부터 철종대까지 총 25방대한 역사서이다.

실록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가 드물어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그 분량이 888책에 이르는 전주사고(全州史庫1439(세종 21 )에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실록을 승의사 진남루 등에 보관하다가 1473(성종 4) 경기전 동편에 실록각을 건립하고 여기에 실록을

비롯한 국가 중요서적을 보관하기 시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 태인 선비 손홍록과 안의를 비롯한 지역민들이 태조어진과 함께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수호하였다. 내장산에서 1년간 지켜진 실록은 이후 아산, 해주, 강화도 등을 거쳐

1597년 평안도 안변의 묘항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져, 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었다.

그리하여 전주사고본 실록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전기 4대 사고 중에서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의

실록은 전란 중에 소실되었으나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지역민들이 사력을 다해 수호한 결과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전주는 역사지킴이의 고장이다.

  왜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실록을 다시 출판하여 조선후기 5대사고(춘추관, 정족산사고,오대산사고,

태백산사고, 적상산사고)에 봉안하였다.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후 강화도 정족산사고에 보관되었다가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현존하는 어진과 역대왕들의 어진제작

   태조에서 철종대 까지 25대 임금의 초상화 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어진 뿐이다.

종과 정조 어진은 남아 있지 않아서, 기록으로 전해자는 모습과 그 후손들의 골격을 토대로 후대에 그린

표준영정국가공인 영정이다.

   조선시대 왕들은 거의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조선초에는 생전에 그리지 못한 경우 다음 왕대에 그렸다.

태종은 생시에 어진이 제작되었지만,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고 하여 자신의 어진을 없애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 세종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보존해 두었다.

   인종은 생전에 어진을 그리지 않있을 뿐더러 그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결국 제작되지 못하였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쫓겨난 왕으로 어진 제작여부를 알 수 없다. 또 조선중기의 인조, 효종, 현종은 어진 제작에 대한

기록이 없다.

   숙종이후부터는 어진제작이 활발해져 여러 본을 동시에 제작하기도 하였다. 영조는 매 10년마다 어진을 그리려고

하였으며 정조 역시 3번이나 다양한 복장으로 어진을 제작하였다. 순조의 세자였던 익종 추존 왕은 22세에 사망했음에도예진세자의 초상의)8본이나 제작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어진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 차례 전란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도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년 창고에 불 이나 상당수가 불에 타고 말았다.

어진 제작 방법

왕의 초상화

   어진(御眞)이란 왕의 초상화로 어용(蓹容), 수용呻容), 진용眞容), 성진(聖眞)이라고도한다. 조선시대 어진제작은

모사,추사,3종류로 나눠진다.

모사는 국왕 생존시에 그린 것이며, 추사는 왕이 돌아가신 후에 그리는 경우이다.

묘사는 기존의 어진을 본 떠 그리는 것을 말한다. 어진 제작 과정은 먼저 이를 담당할 도감을 설치하고 화원을 선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화원이 정해지면 밑그림을 그리고 배채기법으로 채색을 한다. 어진이 다 그려지면 장항표귀을 하고, 표제(누구의 어진)를 쓴 후 진전에 봉안 한다. 매 단계마다 왕과 대신들의 심사과정을 거치고 길일길시(吉日吉時)

택하여 진행하였다.

  털끝 하나라도 똑같지 않으면 초상화가 이니라고 했고, 초상화에 겉 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담아내야 한다고 하였다. 어진을 비롯해 한국초상화 제작기법에서 독특한 것은 배채법으로 화면의 뒷면에서 안료를 칠하는 기법이다. 이렇게 하면 뒷면에 칠해진 안료가 얇은 비단 화면을 통해 색채를 드러내는 만큼 은은하고 깊은 색감을 준다.

    

태조 어진

 태조어진은 1410(태종 10)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었다. 현존하는 태조어진은 1872(9) 조중묵을 10인의 화사가

 새로 모사한 영정이다 건국자의 권위와 위엄이 돋보이는 어진으로 용안의 정면을 비롯한 그린 전신상이다.

머리에 익선관을 쓰고 청룡포를 입었으며, 허리에 각대를 차고 흑화를 신은 평상시 집무복을 입은모습 이다. 눈과 입은 작고 귀는 크며, 오른쪽 눈썹 위에 사마귀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태조는 키가 크고, 몸이 반듯하며,

풍채가 좋다고 하였다. 


세종 어진

    세종은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 용안을 알 수 없다. 현재의 세종어진은 김기창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상상도로 1

973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아들로 141822세에 즉위하여 145054세에 승하하였다. 한글을 창제한 성인군주로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 문화와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46진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영조 어진

  영조어진(보물 932)51세 때 반신상으로 1900(광무 4)에 조석진·채용신 등이 모사한 것이다.

어진박물관 어진은 반신상을 근래에 전신상으로 모사한 것이다 안색이 붉으며, 눈이 치켜 올라가고 코가 오뚝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깐깐한 성정이 엿보인다.

   영조는 172431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52년간 재위하다가 177683세에 승하하였다 조선의 왕 중 최장수 왕이자, 재위기간이 가장 긴 왕이다 탕평책을 펼치는 등 조선왕조의 중흥을 이끌었으며, 조경 묘를 건립하는 등 왕실의

위엄을 높였다.

    

정조 어진

  정조는 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 용안을 알 수 없다. 현 정조어진은 근래에 추정하여 괘 상상도로 1989년 국가

표준영정으로 공인되었다.  정조는 무예에 조예가 깊었으며 풍채 좋은 왕이라고 알려져 있어 이 어진과 차이가 있다.

정조는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아들로 177625세에 22대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80049세에 승하하였다 .조선왕조의 중흥을 꾀한 군주로 규장각을 설치해 학문을 발전시켰고, 왕권 강화를위해 수원 화성을 축조하여 천도를

시도하였다.  

철종어진

    철종어진(보물 1492)은 철종이 31세 되던 1861(철종 12)에 그린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

화재로 오른쪽이 1/3쯤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다. (군부) 차림이며, 초상화에서 보기 드문 손의 형태를볼 수 있다.

오른손에 무관의 지휘봉인 등채를 잡고 왼손 엄지에는 활시위를 당길 때 사용하는 깍지를 끼고 있다.

용모에 순수한 인품이 반영되어 있으며, 눈썹이 짙고 쌍꺼풀이 진 동그란 눈에 눈동자가 안으로 모여 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184919세에 즉위하였다.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안동김씨 세도정치 속에서 정치를 바로 잡지 못한 채 1863(철종 14) 33세로 병사하였다.

    


고종 어진


순종 어진






















조경 묘와 조경단

   조경묘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황실의 시조 사당으로 1771(영조 47) 경기전 뒤에 건립하였다. 이때까지 조선왕실의 시조를 모시는 사당이 없었다.

  조경단은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의 묘소로 건지산에 있다. 1899(광무 3) 이한의 묘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에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하였으며, 고종이 친히 "대한조경단"이라고 쓴 비를 세웠다.




예종대왕 태실 및 비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 26

  이 태실(胎室)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胎層항아리에 담이 등이 둔 석실이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고하였는데, 이를 래실이라 한다. 원래 선조 11(1578) 완주군 구이 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 10(1734) 다시 고쳐 세웠다

   1928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태항아리들 가져 가면서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겼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돌로 덮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 연대를 앞면과 뒷면에 각각 새겼는데, 건립연대는

선조 11(1578)이다. 잘 보존된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뿔 없는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릿돌이 돋보이는 비석이다. 







경덕헌

   이 곳은 경기전을 지키는 수문장이 일을 맡아보는 곳이다. 경기전이 규모와 연혁, 제향, 제사를 맡은 관원의 역할과

 각종 제향 절차 등을 기록한 책에 수문장청(조선시대 궁궐문을 지키던 수문장들의 소속 관청)을 갑자년 신설하여

을축년 준공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경덕현은 수문장청에 이진이름이다


수복청(守僕廳)

   이 곳은 경기전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낮은 직급의 벼슬아치들이 있던 곳이다.

살림집의 안채와 같은 형식이지만 주로 큰 일이 있을 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정 기간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세계조실록세조 8-86일조에 의하면 전주 경기전에 수복의 수가 관노() 1, 양민(일반 백성) 18명이 교대로 지켰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수복청에는 항상 몇 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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