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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무령왕릉, 송산리고분군, 한국관광 100선

♥사랑 2020. 2. 20. 03:00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 한국관광 100선 

백제시대의 왕과 왕족의 묘로 동쪽에는1~4호분,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 있다. (사적 13)

1~5호분은 굴 모양의 돌로 만든 무덤(굴방 식 석실묘)이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로 쌓았으며 중국묘제의 영향을 받았다. 왕과 왕비의 관은 일본의 금송으로

만들어진 것 등을 보면 백제의 건축 기술과 주변 국가와의 교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웅진백제역사관

웅진백제역사관은 백제의 역사 문화 컨텐츠와 IT시스템을 활용 한 교육, 홍보, 체험이 가능하여

쉽고 흥미롭게 백제문화를 접 할 수 있으며 전시관과 영상실 로 구성되어 있다고합니다.

공주 송산리고분군은

백제 웅진 시기 475~538의 백제 왕과 왕족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고분군은 송산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이곳에는 수십여 기의 고분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과 1~6호분까지

모두 7기만 정비되어 있다. 송산리고분군의 백제 무덤은 만들어진 모습에 따라 돌무덤,

즉 횡혈식 석실묘 와 돌무렵으로 구분된다.


진묘수

무령왕릉 입구에서 출토된 국보 162호 진묘수를  3배 크기로 제작한 것이다. 교묘수는 고대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로 중국 남북조 시기에는 무덤 앞이나 안에 있었다.

  우리나라 고분에서는 백제 무령왕릉 에서 처음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은 무령왕릉 및 5·6호분을 정밀하게 재현하여 고분과 동일하게 만들어 무령왕릉을

재현하였으며, 무령왕 체험, 송산리고분군 발굴과정 등을 볼 수 있으며 융성했던 백제문화의 위상을

확인 할 수 있다고 합니다.

1~5호분은 돌로 만든 무림으로 내부는 반구형형태인 무덤 방이 있다. 6호분과 무명왕릉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돌무덤으로 터널형의 무덤 방이 있다.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들은

도굴로 인하여 부장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송산리고분군의 무덤은 이후 사비 시기538~660 부여 능산리고분군에

이르러 무덤 방이 작아지고 구조가 간결해진 모습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무덤의 형태는 신라와

일본으로 전해지는데 이를 통해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활발했던 대외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국보 제 154호 왕 금제관장식 

한 쌍으로 순금판 위에 문양을 예리 한 조각도로 도려내었다. 127개의 달개들을 금실로 꼬아 매달았다

♠ 국보 제 155호 왕비 금제관장식, 

 왕관장식처럼 왕비의 관장식도 금판을 오려 내어 인동문으로 장식하였고 달개가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석수

돌로 만든 동물을 무덤 입구에 놓아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부장문화를 엿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다리작명 은제팔찌

 은팔찌의 안쪽에 (다리라는 장인이 왕비를 위해 팔찌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합니다.

♡금동신발

안쪽, 바깥쪽, 바닥의 3판이 서로 붙어 있으며 바닥은 네모뿔 모양의 못이 박혀있다.

무령왕릉의 발견 송산리 5호분과 6호분은 일찍이 일반에 공개되 었는데 여름철이 되면 무덤 안에

물이 새거나 습기가 차서 고분의 손상이 심했었다. 이를 해 결하고자 19716호분 봉분쪽으로 배수시설 공사를 시작했고 봉분의 일부를 파 들어가던 중 6호분과 비슷하게 가지런히 쌓은 벽돌들이 확인 되었다.


백제를 다시 일으킨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 욘사마의 사마?

무령왕릉의 주인공인 무령왕은 백제 25대 왕으로 개로왕 8(462) 태어났다. 이름은 요즘 사람들이

기억하기 좋은 사마 또는 융이었다.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으며 서기 50140세에 왕위에 올라

나라 의 안정과 국제교류를 활발히 이룩하였다. 그는 오랜 전쟁으로 나빠진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거듭되는 침입을 물리쳐 백제가 다시 강대국이 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대외적으로도 일본 열도의

왜에 오경박사를 보내 백제의 우수한 문물을 전하였고 중국 양나라에 사신 을 보내는 등 동아시아에서

백제의 위상을 높였다고 합니다.

바로 무령왕릉이 1,500여 년 만에 모습 을 드러낸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4,600여 점이며,

하나의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최대 국보를 소유하고 있다. 유물들은 하나하나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학술적 가치 또한 높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무엇보다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왕릉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백제사에 대한 재 평가는 물론 새로운 고대사 연구를

가능하게 하 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무령왕릉

무령왕릉(武寧王陵, 백제25대왕)1971년 배수로 공사를 하다 우 연히 발굴되었는데,

1,500년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완전 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이는 삼국 시대 피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한국 고대의 유일한 왕릉으로, 화려하고 세련된 미의 식과 창의성,

수준 높은 공예기술을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지석이 발견되어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해주었기 때문에 삼국 시대 고고학 편년연구의 기준 자료가 되고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금제관식, 금제 뒤꽂이, 금제 심업형이식(귀걸이), 지석, 석수, 청동신수경 등을

포함하여 총 2,900여 점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국립공주박물관이 대부분 보관하고 있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령왕릉은 묘실 전체를 벽돌로 만든 벽돌무덤으로 널방은 남북 4.2m, 동서 2.72m, 높이 3.1m

남북으로 긴 장방형 평면으로 남북의 짧은 벽은 수직으로 동서의 긴벽은 상단에서 점차 오므려 쌓아

 터널형의 천정을 구성하고 남쪽 중앙엔 널길이 조성되어 볼록자형 단실 구조를 갖고 있다.

널방 바닥은 후면에 한단 높게 관대를 설치한 형태로, 관대 앞쪽은 21cm 낮게 하였다. 바닥의 벽돌은

 삿자리 모양으로 깔았다.널길은 길이 2.83m, 너비 1.04m, 높이 1.45m로 천장은 널방과 같이 반원형

아치를 이루고 있으며 연도 바닥 밑으로 배수구가 설치되어 널문 밖까지 17m 이상 연장되고 있다.

무령왕릉의 벽체는 연화무늬 벽돌을 4단은 뉘어쌓고(길이모쌓기), 그 위에 1단은 세워쌓는 방식

(41四平一整)으로 축조하였는데 상단부의 좁은 면적이나 곡선이 표현되어야 하는 부분은

벽돌형태 및 쌓은 방법을 달리하였다. 천정의 경우 사다리꼴 벽돌을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맞물리도록 쌓아 아치형 천정을 구축하였다.

숭덕전

 백제국 시조 온조왕( )을 비롯하여 웅진백제시(475~538)의 문주왕,삼근왕,

동성왕,무령왕의 위패를 모신 전당으로 백제 옛 왕조의 영광 을 기리는 곳이다.

벽돌이라는 재료의 특성을 이해하고 무덤 밖에서 누르는 흙더미의 압력을 천장이 버틸 수 있도록

벽돌의 모양을 달리하여 아치형의 천장을 만든 것은 과학적 축조의 묘미를 보여준다.

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한 불꽃무늬 장식의 등감 5개와 그 아래에 가창이 시설되어 있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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