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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오희도와 인조의 숨결이 깃든 명옥헌

♥사랑 2019. 1. 12. 11:57

오희도와 인조의 숨결이 깃든 명옥헌

마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창평에 은거하며 학문에정진했던 사람 효성 또한

지극하여 칭송 을 받는 자, 오희도는 욕심이 없었고 오로지 책을 읽으며 홀로 학문에 정진했다. 하루는

큰 뜻을 품은 인조가 반정을 위해 사람을 모으던 중 소문을 듣고 달려와 오희도를 만나고자 했다..

마치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한 것처럼 인조는 함께 하자고 했지만 오희도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당신과 같은 현인이 향리에 묻혀 있소? 다시 생각해보시오.”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조정에는 뜻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조는 뜻을 꺾지 않았다. 올때마다 오희도가 있던 집 앞 은행나무에말을 묶어놓았다.

그러기를 꼭 세 번째 이번에도 인조를 떠나보낸 오희도는 후산리 은행나무 앞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말고삐를 묶어두었던 자리에 진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 그 사람은 이렇게도 절실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구나. 나 같은 사람이거기에 보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에 고리를 씌운 것만은 분명하구나.

그 정성에 감복한 오희도는 인조의 세상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인조가 바로

쫓아내려왔다

이렇게 기쁜 일이! 지금 당쟝 같이 올라갑시다."

"아닙니다. 정식으로 문과를 통해 조정에 나가겠습니다. " 인조가 오희도의 두 손을 붙들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희도는 인조 1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며 인조의

기다림을 떠올렸고, 그로인해 한층 깊어질 조선의 미래를 꿈꾸었다. 



후산(后山)회관


왼쪽은 후산리 은행나무길 오른쪽은 명옥헌원림길 우리는 오른쪽을 먼저 300m로 거리가 조금 멀어서입니다

요즘은 벽화로 아름답게 그려놓은 곳을 많이 볼수 있어요


명옥헌원림 가는 길

배롱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여름이 가장 아름답다. 명옥헌 연못을 둘러싼 배롱나무꽃이 피면 연못이

붉게 타오르는 둣하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두개의 연못이 있는데, 위쪽 연못에 물을 채우고 애래

연못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소리가 옥이 부딪치는 소리 같다고 해서 명옥헌이라 리름하였다고 합니다.




명옥헌원림은 오희도吳希道, 1583,~1623 자는得原, 호는鳴谷의 넷째 아들 오이정 (1619~1655) 이 부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글을 읽고 많은 저술을남긴 별서정원이다.

우암 송시열은 그의 제자 오기석(1651~1702) 을 아끼는 마음에 명옥헌 이라 이름짓고 계곡 바위에

새겼다. 이후 오기석의 손자 오대경(1689-1761) 이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의 앞뒤에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는 적송과 백일홍 등을 심었다.

윗 연못 주위에는 명옥헌계축이란 글씨가 새겨 있으며, 뛰어난 조경으로 이름나 있다.

명옥헌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옆에서 볼 때 자 모양)이다. 정원의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 지내던 도장사터가 남아있다.

 


명옥헌





















감을 깍아 말리고 있어요 먹고는 쉽지만..... 침만 삼켰지요

메주 아주 시골 정감이 물씬 풍깁니다


담양 후산리 은행 나무

                                                                                                         전라남도 기념물 제45호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 면 산덕리
일명'인조대왕계마행仁祖大王繫馬杏' 이라고 부르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인조대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호남지방을 둘러보던 중 창평 월봉月峰
소개로 후산에 살고 있는 명곡 오희도明谷吳希道, 1583-1623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 때 오희도가 거처하는 북쪽에는 은행나무가 있고, 뒤에는 오동나무가 있는데 이들 나무 밑에 인조가

말고삐를 매었다는 후세의 기록이 있다.
이들 나무를 각각 인조의 계마행또는 계마상이라고 불러 현재의 오동나무는 고사하여 없어졌고 은행나무만 남아있다.






키가 30미터에 달하는 이 은행나무는 늦가을 ,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떨어질 때에 그 아래 서 있으면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아름답을 것입니다. 인조대왕이 오희도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이곳 은행나무에 말을 맸다고 해서 이나무를 인조대왕 계마행이라고 부릅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