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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군산 항쟁 기념관, 군산 세관, 군산 여행

♥사랑 2019. 2. 19. 08:18

군산 항쟁관

3.1 대한독립만세운동 4일 뒤인 35, 군산에서 호남지방 최초로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35일에서 5월까지 만세 시위가 계속되었는데 수십명이 부상당하고 사망하였다. 3.1운동 당시 군산에 살

고 있던 한국인이 6,581명이니 1인당4-5번은 만세에 참석한 것이 된다.

또한 항쟁관에서는 1920년대 미선공과 부두노동자들의 항쟁, 옥구 농민항쟁을 비롯한 소작쟁의에

대한 내용도 배워갈 수 있다  


일제의 수탈에 항거한 옥구농민항일항쟁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악랄했던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정면 대항한 사상 초유의 농민저항운동이다.

일찍이 3.1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군산지역에서는 민족 저항 정신이 확산되면서 옥구농민조합(1926),

서수농민조합(1927), 서수청년회(1927)등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악덕 농장주에

대항하는 시위를 벌이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192711, 일본인 지주들이 공동 설립한 대규모 농장인 이엽사농장에서 수확한 곡물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였다.

농민조합에서는 생존을 위해 소작료를 인하해줄 것을 여러 차례요청하였으나, 이를 묵살당한 끝에

1125일 소작료 납부 거부를 결의하였다.

다음날 농장 측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농민 간부 장태상을 솔산주재소에 감금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500여 명의 농민들은 징을 울리며 몰려가 주재소를 부수고 장태상을 구출한 뒤 만세를 불렀다.

또한 서수주재소에 감금된 농민 간부 박상호도 구출하였다. 경찰은 80여 명의 농민들을 체포해 혹독하게

취조하였고, 체포된 농민 중 34명은 실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전개된 농민항일운동으로서 , 일제의 착취와

폭압에 항거한 대표적인 항일투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옛 군산경찰서 터(3:1운동 만세)

191935일 군중과 학생 등 1,000여 명이 군산경찰서 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3.5독립운동을 계획했던 엉명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 릅부 어 군산 시내로 행진하였다. 중도에서

보통학교 학생과 군산교회 교인들이 행렬에 참여하여 시위대업은 500명으로 증가하였고, 평화동과

영동을 거쳐 본정 큰 거리를 지나 경찰서에 이르렀을 때에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군산경찰서

앞에서 구속된 영명학교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경은 재향군인과 이리(익산)주재

헌병대까지 요청하여 만세시위대를 탄압하였다. 당시 검거된 사람은 90여 명에 이른다.

또한 이곳은 노동과 농민운동'비롯한 사회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구금한 탄압장소이다.

군산경찰서는 1910년에 신축되었고 192296일에 증축되었다.








김좌진 장군, 안중근의사



 

 구 군산세관 본관

                                                                                                     전라북도 기념물 제 87

                                                                                                      전라북도 군산시 장미동

이 건물은 군산항을 통해 드나들던 물품에 대해 세금을 거두던 세관이 있던 곳이다. 군산항을 개방한

조선은 광무 3(1899) 인천세관 관할로 군산세관을 설치했으며, 1906에는 인천세관 군산지사를

설립하고 1908년에 이 청사를 준공했다. 독일인이 설계한 이 건물은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을 수입하여

유럽 양식으로 건축했는데, 한국은행 본점 건물과 같은 양식이다. 바깥벽은 붉은 벽돌이지만 내부는

목조로 건축했으며, 슬레이트와 동판으로 지붕을 올리고 그 위에 세 개의 뾰족한 탑을 세웠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 의미외에, 곡창 지 대인 호남지방에서 쌀 등을 빼앗아 가던 일본 제국주의

상징으로서 역사의 교훈을 주는 곳이다.


이곳 전시관은 군산세관이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거울이자 군산항 개항(1899) 이후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항도 군산과 동고동락하며 아픔과 영광을 함께 해 온 세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재개관은 단순히 세관의 유물 몇 점을 더 전시하는 의미의 장으로서가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근·현대사와 세관의 역사를 아우르고 체험하는 복합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본 건물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옛 세관청사로서, 1908년에 건축되어 85년간 군산세관 본관으로

사용하다가 본관 신축에 따라 2006년 호남관세전시관으로 개관되었고 이후 건물누수 등으로 인해

1년간 내·외부 보수 및 전시물 보강 등 전시관 전면 개편작업을 거쳐 '17. 8월 호남관세박물관으로

재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해관 설치는 1876년 개항 직후부터 계속된 일본과의 무관세 무역을 시정 하고 관세자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정부는 개항장인 부산 두모진에 해관을 설치하고 1878 9.28부터 수출입 화물에 대해 세금을 부과

징수하였으나,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반발(두모진 수세사건) 로 1878 12.26. 두모진해관과 과세조처를

철폐하였다.

그러나, 1882.5월 조선과 미국의 통상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 이 체결되고, 미국이 조선의 관세권을

정식으로 인정하자 일본도 조선의 관세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조선도 합법적으로 해관을 창설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정부는 관세행정 및 해관운영 경험이 없었으므로, 청나라 이홍장의 알선 으로

독일인 P.G. 묄렌도르프(목인덕)를 고용해 해관 창설과 운영에 관한 업무를 총괄·지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883.6.16.인천해관, 1883.10.1. 원산해관, 1883년 11일3일 부산해관을 설치하고

관세업무를 개시하였다

이후 1897.10.1. 목포해관, 1899.5.1 군산해관 등을 설치하여 조선정부의 자주적 관세권을 지켜왔으나,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은 조선해관에 대한 모든 권한을 독점하게 되었다.

1907.4.12. 일본은 해관을 세관이라 개칭하고, 1908.1월 관세국 관제와 세관 관제 등을 제정·

시행함으로써 조선해관을 일본 세관의 일부도 흡수 통합하였다.











불법의 약품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취급에 대한 국제 규약 대상품



불밥의약품


군산 근대역사 체험공간

부지 5,920 (1,794)에 시대형 숙박체험관 (5), 근린 생활시설(12), 근대역사교육관(3),

건축재생관(1) 등을 조성하여 1930년대 근대군산 생활모습을 복원한 공간이다

이 일대는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한곳이며 지금도

인근에 일본식 사찰 일본식 건축물 등을 볼 수 있다. 1930년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땅을 자기나라

땅 인양 건물을 짓고 거주했던 이 공간에서 나라 잃고 서러웠던 시대의 아픔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역사는 흘러간 과거가 아닌 우리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