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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전주한옥마을, 전주여행, 국제슬로시티

♥사랑 2019. 2. 18. 06:38

전주한옥마을

가장 한국 적인 도시, 전주 전통문화도시 전주를 대표하는 전주한옥마을은,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 부터 2010년 11월27일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되었습니다. 전주한옥마을의 가치와

위상은 '국제슬로시티 선포사'에 드러나 있듯이 전주한옥마을은 일제 강점기 시절 저항의 상징이자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뿌리입니다. 민족혼이 살아있는 전주 한옥마을은 슬로푸드의 대표음식 비빔밥과
세계무형문화 유산인 판소리를 온전히 간직한 곳으로 거대한 전통박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국제슬로시티연맹은 선포사를 통해 서울이 한국 행정의 수도라면 전주는 한국 전통문화의 수도 라고
밝히고, 전주한옥마을을 최초의 도시형 국제슬로시티로 브랜드화하기 위해 국제적 브랜드로 선포하였습니다
"국제슬로시티 전주한옥마을 지정 선포사 중에서"


국제슬로시티 전주한옥마을

전주한옥마을

오목대 올라가는 길

오목대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 1380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 길에 잠시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한 제국 광무光武4년 1900에 비석을 건립했는데, 태조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의 태조 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髢蹕遺址)라는 비문을 고종황제가 직접 쓴 친필을 새긴것이다.





전주한옥마을 유래

일제강점기

전주 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발전했다.

그렇다면 전주에 처음 들어온 일본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897년 이노우에와 모리나가라는

야마구치 현 출신의 두 형제가 들어왔던 것이 최초이다. 일본 옷을 입고 전주에 나타난 이들을 보고

개들이 울부짖었고 동네 사람과 꼬마들이 줄줄이 따라 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주로 잡화상이나 매약상으로 활동하며 말라리아약, 회충약, 사탕, 과자, 거울, 석유,

램프 등을 취급하였습니다. 당시 외국인은 성내에 살지도 못할 뿐 아니라 좌판을 벌려서도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서문시장과 남문시장에서 행상을 하였다.

을사늑약(1905)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도로(全群道路)개설(1907)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60년대

1930년을 전후로 뜻있는 선비들과 주민들이 서쪽의 일본인 거주지의 반대편, 조상의 얼이 스민

오목대와 이목대, 한벽당이 굽어보고 있는 동쪽 지역에 집단으로 한옥을 건립하고 마을을 건설했다.

이렇듯 고고한 선비정신이 깃든 한옥마을은 해방 이후인 196-70년대 전주의 명문학교들이 모여있는

교육의 거점 역할을 했으며 전주 한옥마을 일대를 둘러싸고 중앙초, 성심여중고, 전주여고, 북중학교,

전주고등학교, 전주공업전문학교 등 학교기관들이 대거 한옥마을 내에 위치해 있었다. 지방의

지주들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풍남동 일대에 집을 사고, 지방에서 전주 유학을 온 학생들은

한옥마을에서 자취나 하숙을 하며 수학하였으며, 당시 북중학교를 거쳐 전주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엘리트 코스였고 여자들은 전주여자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노력했다.

근대 도시형 한옥들로 형성된 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 전후까지만 해도 부촌이었다.

문화연필,

백양메리야쓰 같은 유명 기업이 한옥마을에 자리하기도 했으며 문화연필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생긴 연필공장으로 1946년에 대전 동아연필이 생겼고, 1949년에 문화연필이 생겼다. 또한, 1950년대

이후 내의류업체 BYC옛상표인 백양메리야스를 제조하던 생산시설이 1980년까지 이곳 한옥마을에

위치했었다.

1970~90년대

그러나 제조업이 도심 외곽으로 이전하고, 또 점차 주거 환경이 변화되고 현대화되면서 한옥마을이

퇴락하기 시작하였다. 1977년 한옥보존정책이 시행되면서 퇴락은 가속화되었으며 한옥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마을은 급격히 공동화(空洞化)되기 시작했다. 이후 주민 반발이 높아져 19872층까지

건축이 가능하도록 건축 규제가 완화되었고, 1997년에는 한옥보존지구가 해제되었다. 이 때 2

양옥들이 몇 채 들어섰지만, IMF와 건설 경기 불황으로 많이 훼손되지 않고 현재와 같은 경관이

만들어졌다.

2000년대 ~ 현재

빈촌으로 자리해 가던 한옥마을은 2000년대에 들어와 극적으로 변모되었다. 전주가 2002년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세계인의 축제를 앞두고 전통문화도시 전주의 면모를 내외에 알리자는

계획에 따라 전주 한옥마을이 전통문화 특구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지속적인 재정 투입을 통해 한옥을

정비하고 관광객들을 위한 문화시설들을 구축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2010년 전주는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도시형 국제슬로시티로 선정되었고,

 2016년 재지정되었습니다. 또한 2016년 론리플래닛이 선정한 ‘1년 안에 가봐야 할 아시아 10대 명소'

3위로 선정되기도 하는 등, 전주 한옥마을은 국제적인 문화관광의 명소가 되어 한 해 천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전주 한옥마을을 다녀가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국제적인 문화관광

명소가 되었다.

( 재료제공 출처 : 전주시청 홈페이지 전주한옥마을 )




전주공예품 전시관











한옥 마을 거리 풍경

풍물 마당 놀이








경기전

  사적 제 339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건국자의 초상이며, 경기전 또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지방의 진전이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

진전(眞殿)은 어진을 봉안한 궁전을 일컫는다.

조선은 건국 후 이를 기념해 1410(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경기전은 1614(광해군 6)에 중건한 것이다. 경기전 경내에는 진전 동편으로조선왕조실록

을 보관하던 전주사고가 있고, 구이 태실마을에서옮겨온 예종대왕 태실이 있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태조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가 동북면 쪽으로 이주해

갈 때까지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다.

조선왕조는 건국 후 이를 기념해 전주에 경기전을 건립하고 여기에 태조 어진(초상화)봉안하였다.

경기전(慶基殿)이라는 이름은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이다.

전주는 조선왕실의 고향이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경기전을 비롯하여 조경묘와 조경단, 오목대와

이목대 등 많은 왕실 유적들이 있다.



전주 전동성당

전주 전동성당은  사적 제288호로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에 있습니다.

이 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도의 순교터에 세운 성당입니다.

정조 15년(1791)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인(야고보)

그리고 순조 원년(1801)에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지헌(프란치스코)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한국 최초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호남 제일성 (풍남문)

전주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은 풍남문(豊南門)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88년 전라관찰사 최유경에 의해 창건된 풍남문은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의 숭례문 (남대문)과 같은 형태의 특징을 보인다.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황토현에서 대승을 거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의 치열한 격전장이기도 했다. 풍남문과 지척에 있는 전동성당은 풍남문의 성벽을

헐어 낸 돌로 성당의 주춧돌을 세웠다고 한다.

옛 전주부성의 남쪽 문인 풍남문은 전주읍성의 동서남북 네 곳의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보물 제308호이다.

  1338년 축성한 이후 1597(선조 30) 정유재란 (丁酉再亂)으로 성곽과 성문이 모두 파괴되어

1734(영조 10) 관찰사 조현명이 성곽을 중건하고 남문의 이름을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 그러나

1767(영조 43)의 대화재로 불타 이듬해 관찰사 홍낙인이 재건하고 남문을 풍남문(豊南門)으로,

서문을 패서문(沛西門)이라 하였다.

그 후 종각, 포루 등이 일부 헐리고 지면이 묻히는 등 원형이 훼손되었으나 1978년부터 3년간의 보수

공사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풍남문'이란 이름은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패(豊沛)

빗대어 태조 이성계의 관향인 전주를 풍패향이라 부른 것에 기인한다. 전주부성 가운데 남쪽 성문을

풍패향 전주의 남문이란 뜻으로 풍남문이라 하였다.

 

 풍남문은 1층은 앞면 3, 옆면 3칸이며, 2층은 앞면 3, 옆면 1칸으로 문루의 1층에 앞뒤로 4개씩

세워진 높은 기둥이 그대로 위로 이어져 2층의 변두리기둥이 되도록 하였다. 이런 기둥 배치는

우리나라 문루 건축에서는 예가 많지 않아, 풍남문은 건축적인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남부시장 청년몰

청년몰은 꿈이 있는 청년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모인'청년상업공간' 입니다
문전성시 사업의 일부로 2011년에 출범되있고 2013년 사업이 종로된 그후 지금까지 청년물은 외부의

지원없이 청년상인들의 자치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청년몰의 상인들은 이해와 배려를 통하여 서로의

상권을 존중하려 노력하고있으며 각자의 전문성에 따라서 공연기획팀, 디자인팀, 총무팀, 홍보팀, 환경팀에 속하여  청년몰을 발전시키기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주 교동 한옥 마을 119 소방서



강암서예관


강암 송시열 선생님이 쓰신 천자문

남 천 교(南川橋)

남천교는 조선후기 다섯 무지개다리로 불리었으며 숭암산과 한벽당이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였다.

일명 다리 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겼다 해서 오홍교(五虹橋)라 불렸고, 또 다리윗 부분에 용이 조각되어

오룡교(伍龍橋)라고도 하였다.  다섯 개의 창을 가진 안경을 담았다 해서 안경 다리(眼鏡橋)라 했으며,

각 창 머리에는 용머리를 새겨 놓아 승암산 화기(火氣)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남천교의 역사를 보면 영조 29년 계유(1753)년 유실되었다. 정조 경술(1790)년 복구작업을 시작하여

1791년 12월에 완공하였다. 이때 다시 만든 석교가 시냇물을 가로질러 묵직하게 걸터앉은 모습은 마치

하늘이 던져준 듯하고 땅에서 불끈 솟아난 듯하여 사람들의 힘으 로 만들어낸 것 같지가 않아 탄복을

하였다 한다. 현재 남천교(南川橋)는 2009년 전주시가 옛 고지도에 나오는 홍예교의 모습을 복원하여

새롭게 가설된 것으 로, 무지개다리 위에 누각을 만들어 전주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청연루

상관계곡을 지난 차갑고 맑은 물이 한벽당 주변을 돌아 흐르는 전주천이 그 옛날에는 푸른 구슬처럼

투명하게 맑았고 또 여름에는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였으며 한벽루 절벽에 부딪쳐 소용돌이

치면서 하얀 포말을 이루는 장관을 일컬어 옛 사람들은 한벽청연(寒壁晴煙)이라는 문귀로 찬미 하였다

하여 전주 8경의 하나인 한벽당을 이르는 한벽청연(寒壁晴煙)의 유래에서 청연루(晴煙樓)로 이름

지어졌다.
청연루는 무지개 다리 형태의 교각에다 한옥 누각을 올린 독특한 양식으로 정면 9칸, 측면 2칸의

평면에 팔짝지붕 모양의 전통한옥 목조 누각으로 건축 주변 전통한옥마을, 전주천의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져 전통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전주남문교회

어머님이 섬기던 교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믿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