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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낙안읍성, 순천가볼만한곳

♥사랑 2019. 2. 25. 07:20


순천낙안읍성

 

사적 제302

소재지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동··남내리

순천 낙안읍성은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읍성들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보존된 곳으로 특히 성 안에는

전통적인 가옥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삼한시대엔 마한, 삼국시대엔 파지성, 고려말 이후부터는 낙안군지역으로 성곽은 조선 태조 6(1397)

낙안출신, 전라도 수군도절제사 양혜공, 김 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흙으로 쌓았고,

석성으로 중수된 것은 그로부터 약 300년 후인 인조 4(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낙안군수로

부임한 이후 라고 한다.

읍성 전체 모양은 장방향으로, 성곽 길이는 1.410m이고, 전체 면적은 223, 108이다. ··남쪽

3곳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서로 연결된문이 있고, 4군데의 치성이 있어 적의 공격을 효과적 으로 어하기 위한 선조들의 우수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성 안에는 90여 가구의 민가가 있는데 실제로 주민이 거주하고 있어 그가치를 더하고 있으며 ,

보통 1가구당 2-3채의 초가집과 마당, 텃밭으로구성되었다. 초가집은 3칸 정도의 일자형 안채와 아래 채, 그리고 농기구등을 보관하거나 외양간으로 겸용하는 헛간채와 재래변소로 이용하는잿간으로 이루어졌다.

낙안읍성은 1983614일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13점의 문화재

(국가지정 10, 도지정 3)를 보유하고 있으며, 2011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리댁

                                                                                                 국가민속문화재 제100

낙안읍성 안에서 가장 단아하고 건실한 구조를 지닌 초가집이다. 19세기 말에 건축된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으로 향리가 살았던 집' 이라고 전해 온다. 앞쪽에 성벽을 뒤쪽에 길을 두고 있다.

안채는'一'자형 4칸 집으로 왼쪽부터 부엌, 안방, 고방, 작은방으로 순으로 되어 있다. 앞쪽과 건넌방

옆에도 툇마루가 있다. 안방과 고방 뒤쪽으로 난 퇸칸은 흙바닥으로 되어 있는데, 곡식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좁고 긴 고샅(골목길)과 돌담장 출입구의 꺾으기법, 집 주위 대나무 숲 등에서 조선 후기 민가 정원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대장금은 조선조 중종 대에 활약했던 한 여성의 성공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로서 20039 15일부터

2004330일까지 방영되었다. 15세기 조선의 궁중에는 수많은 직분의 여성들있었고 엄격한

궁중의 법과 제도하에서 각기 침방 세담방, 대비전 후궁전 등의 일을 맡아 했던 조선 시대의 양반들이

차지했던 의관 자리를 장금이라는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의술 인으로 거듭나는 한여성의 

성공적인 사례를 담은 이야기이다







연자방아

오랜 옛날 인류가 주식인 곡물을 사용하게 되면서 이를 가공 하기위한 수단으로서 처음에는 평평한 돌 위에 낱알을 놓고 작은돌로문질러 알곡을 취하였으며, 그 뒤에 멧통, 절구, 연자매 등으발전하기에

이르렀으며, 연자매, 또는 연자방아는 ()나 말()의 힘을 이용하여 많은양의 곡물을 을찧 거나 빻을 수있게것이다

오늘날 도정업(搗棈業)이 기계화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일부 시골에서가끔 볼 수 있을 뿐이다

    




낙안읍성 전통혼례상차림 및 전통혼례

대나무: 신성한 장소임을 의미함

동백 또는 소나무 : 절개와 수절을 나타냄

1: 닭은 영물로서 잡신을 막고 수닭은 벼슬길에 오르기를 기원 하고 땅을 후벼 먹이를 찾아

          암닭과 병아리를 불러 나누어 이는 짐승으로 처자를 위해 노력하며 화목을 다짐하는것을 의미함

시루떡 : 가택신과 기타신에게 올리는 제물을 의미함.

실타래 : 무병장수, 신랑 신부의 백년해로를 의미함.

숭어 : 입신출세, 효도의 상징을 의미함(실제 구하기가 어려워 무우로 깍아 놓기도 함)

대추 : 씨가 하나로 일부종사와 자손의 번창을 의미함.

: 아들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마음과 가문의 뿌리를 이어 갈 것을 의미함

,: 잡귀, 잡신을 물리침을 의미함.

무명씨 : 무병장수와 역신을 물리치고 부귀를 상징함.

은행   : 부부의 화합과 금슬을 의미함

쌀      : 재물과다복하기를 기원함

촛불  가정에 우환 없이 항상 좋은 일과 행운을 기원함.

청실홍실 : 청실홍실을 함께 꼬아 길게 늘려 표주박 잔에 연결 하는데 신랑 신부의 화합과 백년해로를

                의미함

표주박 술잔 : 박은 원래 하나인데 둘로 나뉘었다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 , 남녀 가 제 짝을 찾아

                   하나가 됨을 의미함.

꼬막 : 이 지역에서만 나는 특산품으로 다복과 풍요를 의미함.

옛날 민간에서는 밤에 이를 가는 아이들에게 혼례상에 차렸던쌀을 씹게 하거나, 혼기를 앞둔 총각들이

혼례상의 청실홍실을몸에 지니고 다니면 배필이 빨리 생긴다는 속설이 있다.

 전통혼례의 의미
원래 혼인의 혼(婚)자는 혼(昏)에서 유래한 젓으로 혼례는 어두울 때 행하는 것이 예로 되어 있습니다.
대대 례" 라는 고서에 따르면 관혼은 사람의 시작이라 하여, 혼인은 곧 인륜의 시초라 하였습니다
인륜지 대사요, 만복의 근원인 우리의 전통혼례는 단순한 남녀간의 만남을 넘어서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 첫걸음을 내딛는 인륜의 출발점으로 여졌습니다.
전통혼례의 절차
전통혼례의 절차는 양가의 혼담과 혼례의사를 문는"의혼, 혼약이 이루어져 사주를 보내고 연길을 청하
는 남채" 신부용 혼수와 혼서 및 물목을 넣은 혼수함을 보내는"납폐", 그리고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를 맞아오는 예로서 지금의 결혼식의 의미를 갖는 “친영" 의 절차로 이루어 집니다.
친영은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排禮),합근례.(合卺禮)의 순서로 행하여지며, 주례자가 홀기(笏記)에 따
라 식을 진행합니다.
전안례:  전안례란 신랑이 기러기를 신부댁에 전달하면서 혼인에 대한 승낙을 구하는 절차입니다
             기러기는 배필을 한번 구하면 평생 주절과 정절을 지킨다고 합니다.
교배례:  전안례가 끝나면 신랑과 신부는 초례청에서 처음으로 인慢나누며 신랑과 신부가 서로

            상대방에게 절을 합니다. 이 교빼례로써 신랑과 신부는백년해로를 서약하는 것입니다.
합근례:  신랑 신부가 한 표주박을 둘로 나눈 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의례 입니다. 술은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는 것을 의미하며 표주박에 따라 마시는 술은 부부의 화합을 의미합니다. 표주박은

            그것이 반으로 쪼개지면 그 짝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게 되며, 그 둘이 합쳐짐으로써

           온전한 하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폐백    : 신부가 시부모님과 시댁의 여러 친족에게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는 예를 "현구고래" 라하여

            이예를 행할때 신부 쪽에서 준비하여 시부모님과 시조모님께 드리는 음식을 폐백이라 합니다.

           폐백은 지방에 따라 또는 가풍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대추와 쇠고기 펀모로 합니다.




낙민루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6.25 전쟁 중(1951)에 소실되었다가

1984년부터 시작된 낙안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87년 건립되었다.
낙민루(樂民樓)는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누각 건물로서, 1층은 12개의 사각형 돌기둥을 세워 동헌의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2층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원형기둥을 세워서 팔작지붕을 받게 하였다.

또한 중앙에는 낙민고를 설치하였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내부 본부에는 모로단청 하였다.

현판은 남송(南松) 신계우(申季雨) 전(前) 승주군수 필체로 복원하였다. 더불어, 낙민루 앞뜰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나주부사가 각 군을 순회할 때 아홉 번째로 들러 쉬며 머물렀다

하여 구정(九停)뜰 이라고 한다.

동헌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서 감사(監司), 병사(兵使), 수사(水使),수령(守令)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訟事)를 처리하던 곳으로 동쪽은 수령 서쪽은 관리, 중앙마루는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

사용했다.
지금의 동헌(東軒)=사무당(使無堂)은 1990년에 정면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복원되었다.

한편 동헌은 사무당이라고도 불리는 사무(使無)는 논어 안연편에 이르기를 지방 수령이 송사까지

책임을 지고 있어 더러 백성의 피해가 많아 권력을 남용하거나 백성들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를 낙안읍성 당호에 담고 있다.



옥사(獄舍)란 옛 지방관아에 딸린 부속사로서, 이곳 옥사 역시 고을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을 임시 격리

수용하였던 시설이다.

낙안읍성 옥사는 그동안 폐사되었던 곳으로 2002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좌측은 여름 옥사로 우측은 겨울 옥사로 사용하도록 설계 되었다. 또한 옥사 주변의 담장 역시 어느

담장보다 높게(2.5m) 쌓여 있으며 관아 옆에 옥사가 있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낙안읍성의 옥사는

관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점이 특이한데, 이는 낙토민아의 고장으로서 역대 군수들이 선정을 베풀어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낙안읍성 내에 흉악범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옥사 주변에는연지()

두어 죄수들의 탈주를 막아주는 역할도 했을 것으로 추측된된다




내아

동헌의 좌측에 위치한 이 건물은 수령의 안채로 사용하던 건물로 내동헌(内東軒)이라고도 한다.

평지에 기단을 쌓고 건물을 올려 놓고 있는 'ㄱ' 자형 건물로 앞면 7칸, 측면 2칸의 대청마루 방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54.59평의 팔작지붕이 있으며, 서쪽에는 창고가 설치되어 있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동쪽편(우측)으로는 고을 수령이 일상적으로 머물면서 손님을 맞거나 책을 읽는

사랑채, 서쪽편(좌측)으로는 안채, 단아래에는 마당으로 이루어져있다.
내아(内衙) 역시 1990년 동헌과 함께 옛기록을 바탕으로 복원되었다.



낙안객사

객사(客舍) = 낙안지관(樂安之館)는 왕명으로 오는 사진들과 고을 찾아오는 기타 관리나 외빈들이

머물다 갔던 곳으로, 고을의 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로 동헌보다 격이 높아 낙안읍성 내(内) 가장 중앙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낙안객사(客舍)는 1450년(세종32년)에 군수 이인(李茵)이 건립한 후1631년(인조9년)과

1857년(철종8년)에 중수하였다. 현재는 객사 본전만 남아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알수 없으나

1900년대 초까지는 남아있었다고 하며, 1909년 이후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다가 1982년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안객사는 동쪽 방은 문관(文官동반)이 서쪽 방은 무관(武官=서반)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객사

중앙 마루에서는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시거나 고을의 대소사시 향궐망배례(向闕望拜禮)를

행하던 곳이다.
건물형태는 정면 7칸, 측면3칸으로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되어 있으며, 본사의 경우 맞배지붕이고,

양날개는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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