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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한국관광 100선 진주성, 촉석루

♥사랑 2019. 6. 19. 01:30

진주성

임진왜란 3대첩(진주대첩, 한산대첩, 행주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과 의기 논개를 떠올리게 됩니다.

진주성이 호국충절의 성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진주대첩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10, 왜군 2만여 명이 침공해 올 때 진주 목사 김시민은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의 힘을 합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청사(靑史)에 우뚝한 진주대첩입니다.

크게 패한 왜군이 설욕을 노린 10만여 명으로 재침하자 7··군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했습니다. 진주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의기 논개입니다. 논개는 왜의 재침으로 성이 무너 지자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왜장을 유인해

강물에 몸을 던져 충절을 다 하였습니다.



공북문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와 진주 지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입니다. 공북문의 공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 뜻이고, 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 합니다. 따라서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행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문입니다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이며 주 출입문으로 도청 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된 문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고유하던 자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시민 장군 동상 및 전공비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 대첩을 이끈 주인공으로,  선조 임금은 임진왜란 중에 일본 군을 무찔렀거나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운 인물을 대상으로 상을 내렸는데 김시민 장군은 2등 공신으로

선무공신교서를 내렸습니다.



천자총통

천자총통은 조선 태종때부터 제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사용된 화포 중에서 가장 큰 화포 입니다

이포는 성안에 설치되어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 성을 공격할때는 성벽을 무너뜨리는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임진년(1592)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년(1593)에 순국한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해 건립되 제단 입니다. 임진왜란 진주성 1차 전투(1592, 10)에서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이 왜군2만여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친 임진년의 진주대첩을 기리고, 이듬해인 계사년(1593) 6월 진주성 제2차 전투에서 민·관·군7만여 명이 치열한 전투 끝에 모두 순절(殉節)한 의로운 넋을

기리는 제단입니다.


진주성의 남쪽 벼랑 위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합니다.

고려 고종 28(1241)에 진주목사 김지대(金之位)가 창건 한 후 몇 차례의 전소가 있었고 여러 차례 고쳐

지었습니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지은 까닭에 누()의 이름을 촉석이라 하고 전해집니다. [촉석루기, 하륜] 그리고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부릅니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 선 족장 전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19506·25전쟁 때 불탄 것을 진주 시민들이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국비 도비·시비와 시민 성금으로 1960년에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촉석루 현판 중 북쪽의 것은 정조 때의 명필 송하 조은형이 썼으며, 남쪽은 우당 정현복, 남장대는 은초 정명수의 글씨이고,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이라는 글씨는 청남 오제봉의 글씨입니다.

의암

임진왜란 때 논개(論介)가 순국한 바위를 말합니다. 조선 선조 26(1593) 629(음력)임진왜란 제2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 되고 7만 명의 민··군이 순절할 때 논개도 의암 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했습 니다. 이에 논개의 의열(義烈)을 기리고자 진주의 선비와 백성들은 이 바위를

'의로운 바위' 즉 의암 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인조 7(1629) 정대륭(鄭大隆)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습니다. 위험한 바위라 하 이라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의기사


1593년(宣祖26)6월 남편 최경회(崔慶會) 현감을 따라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했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무너지고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군 승전연에 참석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진주 남강변 현재의 의암이라 불리는

바위로 유인하여 함께 투신 순국한 겨레의 여인 주논개(朱 論介)의 영정입니다.

진주성 우물

진주성은 삼국시대부터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쌓은 정으로 당시부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후기 진주정도에 표시돼 있는 3곳의 우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임진년 1진주대첩 당시 진주성의 관군과 백성들의 주요 식수원으로 사용됐던 것을 2013년 진주시가 발굴·복원했습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석축 우물로 14단의 토관과 오수 유입 방지를 위한 둘레돌이 확인돼 근대까지 개조와 재활용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복원된 우물의 크기는 깊이 8.3m, 직경 1.5m입니다.


영남포정사 嶺南布政司

 진주성에 현존하는 최고의 건물로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이며 그 전신은 망미루입니다.

조선 광해군 10년(1618)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2층으로 신축했습니다. 영남포정사 문루는
진주목(晉州牧)시대에는 진주성 내성의 관문 이었고, 고종 32년(1895) 관찰부가 설치될 때는 진주관찰부의 관문으로 영남의 정사를 선포하는 행정중심지를 뜻하는 말로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을 내걸었습니다.

1896년 진주관찰부가 경상남도청으로 바뀌면서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의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며

1925년 도청 소재지가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 역할을 했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가야문화를 소개하고, 서부 경남의 고고학적 연구·조사를 담당하는 국립 기관으로 1984년 11월에

개관했습니다. 전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간의 흐름을 위주로 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난 인과 과정,

결과 및 후대평가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방향에서 관련된 유물 200여 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2001년 11월 19일 국립진주박물관은 새롭게 두암관을 개관 하면서 더욱 다양하고 품격 높은 유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진수성과 창렬사


남강음악 분수대 와  도도히 흐르는 남강을 가로지르는 천수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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