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께 영광을 !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러진것을 감사합니다

여행 이야기

거금대교, 김일, 김일 체육관, 고흥여행

♥사랑 2019. 3. 2. 09:19

 거금대교 와 김일 기념 체육관 

한센인의 한이 서린 소록도와 대한의 열 번째섬인 거금도를 연결하는 거금대교가 최고 기술인들의

땀을 이곳에 모아 새천년의금빛으로 열렸다

거금대교(居金大橋)는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와 도양읍 소록도를 잇는 다리이다. 총 사업비

2732억원을 투입해 200212월에 착공하여 20111216일에 완공하였다. 총 연장 2028m이며

이 중 사장교 구간은 1116m, 접속교 구간은 912m를 차지한다. 대한민국 처음으로 자전거·보행자 도로와

차도를 구분한 복층 교량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거금대교

소록 터널을 지나면 바로 거금대교가 있습니다. 기념 촬영을 할수 있도록 예비 차선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거금대교 공원


꿈과 사랑의 다리가 되어라


 천년의 질극한 삶을 품고 살아온 거금도 적대봉과 용두붕에우뚝 걸터앉은듯 섬과 섬을 잇는 사람과

사람을있는 오천명 새로운 생명줄의 터전이 될 대한의 열번째 섬을 뭍으로 잇는 새천년의 금빛

거금대교가 열렸다.하늘로치솟는 연 즐 높이'꿈이 벙그는 광활한 우주 세계클 펼치는 고흥(高興)에

거센 파도와 폭풍우속에서도 우뚝 선 섬들을 잇는 현대건설의  기술로 수놓아 한반도를 거침없이

솟아오르는 바다의 진군 가슴에 픔은 생명의 숲 청정바다가  붉은 노을 필쳐진 거금대교 위을

 달린다. 이천년 과거와 미래를 잇기 위마여 이천 미터의 긴 섬 다리를 놓아 흰옷 입은 사람과

느림으로 걸어가는 자전거 시간을헤쳐가는자, 길이 한데 놓여 현대의 땀과 눈물로 짓이겨진 상징 다이아몬드 주탑 케이불 위에 영원한 한결같은 풍요 거금의 꿈이 영근다.




절이도 해전 승전탑
절이도 해전은 임진왜란 마지막 해인 1598년 7월에 조·명연합수군이 고흥 바다를 침입한  왜군을 격퇴한

전투이다.
선조는 1597년 1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해임하고, 그해 7월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대패한다. 이에 선조는 8월 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이후 이순신은 수군 재건에 진력하여 명량해전에서 대승하고, 고하도(목포)에서도 전선과 수군을 

 보강하고 군량미를 비축한 뒤 고금도(완도)로 이동한다. 1598년 7월에는 명나라 진린(陳璘)이 이끄는

수군과 합세하여 조·명연합수군의 첫 작전인 절이도 해상전투에서 승전한다

거금대교


불랑기 (佛狼機)

불랑기포 또는 불랑기라고도 불리는 이 포는 15세기 유럽에서 사용된 화포로 중국 남부지역에

포르투갈인들이 가지고 왔다. 이들을 프랑크 (Frank)라고 부른 데에서 한자식 표현으로 불랑기가 되었다

불랑기는 포신이 모포와 자포로 분리된다. 모포는 발사틀의 구실을 하며, 자포에 탄환과 화약을 채워서

모포 후미에 삽입하여 발사하는 후장식 대포이다. 이는 기존의 방식과 전혀 다른 현대화된 방식으로 발사

시간이 절약되었다

조선에는 15931월 평양성 탈환 때 중국으로부터 들어 왔다. 이후 1614년 조선에서도 불량기를

제조하였고 다음해 제조가 완성되었다. 그 특징은 조선식으로 제조되어 가늠쇠 구멍과 가늠쇠가 붙어있다.

불랑기 크기는 소형으로 지름 28mm, 길이 0.74m부터 대형으로 지름 58mm, 길이 1.43m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유물은 1667년에 제작된 불랑기 자포(3)로 보물 제86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까지 10여점이 전하고 있다


꿈을 품다

 고요히 잠들어 있던 고흥을 마침내 깨어난 거인으로 표현하였으며  그 거인이 하늘너머 우주의 별에

손이 닿는 형상을 나타내었다.
고대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대우주' 를 닮은 소우주' 로 인지한다.
이는 고흥군민 모두가 하나의 작은 우주이며 그를이 이뤄내는 확합의 에너지가 염원을 이루는 순간을

표현 하였다.
이는 곧 고흥은 우주다" 를 역설한다.
하단부 전망대는 "고흥의興. 을 상징한 형상이다. 고흥의 '흥' 을 일으키는 물결과 그것을 실어 나르는
바람을 모티브로 디자인 하였다. 흥겨움이 넘실대는 이 땅(고흥)에서 인간(고흥인의 손에 볕(염원)을 닿으려는 찰나, 그 염원을 이루는 순간을 나타내었다


김일 기념 체육관

박치기왕 김일 영원한 전설이 되다

프로레슬러 세계 쳄피언 김일

김일 기념 체육관


프로 레슬러 김일소년의  역사의 웅지

1929년 고흥군 금산면에서 태어난 김일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두뇌가 명척하고 힘이 뛰어났다.

아직 어린 나이인 16세에 이미 6척 장신으로 성인들을 제치고 황소를 타는 등 호남의 씨름판을 휘어잡는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은 김일은 터 큰 게 상을 향한꿈으로 한창 인기가 높은 프로레슬링 의 세계적 선수가 되고자 결심한다. 마침내 28게 되던 1956. 일본 레슬링계에서 큰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역도산(1924 ~ 1963)을 찾아 밀항한다.

 

스승 역도산과의 만남

하지만 역도산을 채 만나기도 전 불법체류자로 1년 가까이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 역도산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내자,

이에 감응한 역도산의 보증으로 교도소를 벗어나 1957도쿄에 있는 역도산체육관 문하생으로

갈망하던 레슬링계에입문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밭게 되는 모진 모욕과 멸시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김일은 오히려 더욱 각오를 다지며 체력단련파 기술 연마로

담금질을 하였다


호랑이를 때려 잡은 사내의 투혼

'호랑이를 때려 잡는 사나이, 김 일은 오오키 긴타로 이름을 스승 역도산으로부터 부여받고 일본에서

조선인이라는 신분으로써 쏟아지는 온갖 차별을 오히려 자신으로의 관심으로 만들어 버린다. 184cm의 키에 120을 육박했던 탈아시아급의 슈퍼코리안 김 일은 호랑이와 곰방대가려진 가운을 입고온 몸을

불사른 투혼으로 일본레슬링계를 평정한다.

한국프로레슬링의 서막을 열다

19656월 귀국한 김일은 한국 프로레슬링 1기매인 장영철, 천규덕과 함께 대한민국 프로레슬링의

막을 열었다.

한창 근대화의 열풍이 일던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프로레슬링은 매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로서 국민적 사랑을 받게 되는데, 거기에는 "자원이나 체력 등 모든 면에서부족하지만 우리도

백인에게 이길 수 있고, 일본인들도 이길 수 있다"고 강조한 김일이중심에 있었다.


박치기 한 방의 꿈과 희망

김일은 프로레슬링 사상 가장 어린 나이(20 )에 세계 챔피언이 된 헝가리게 미국인 루테즈를 실신시킨뻔

 했으며, 일본이 자랑하는 자이언트 마마아 안토니오 이노키 같은 수많은 레스링계의 강자 들을

막치기로 쓰러뜨렸다.

아직 개발도상국이라 여러모로 어렵던 시절. 우리 국민눈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기주던 김일의 백인마

일본인눈을 향한 롱매한 막치기 한 방은 말그대로 꿈이자 희망이었으며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세계 프로레슬링계의 전설

천부적으로 타고난 힘에 스승 역도산으로부터 전수 받은 기술로, 1년이 지난 195812월 첫 데뷔전을

가진 이후 새 5년이 지나지 않은 1963, 미국 LA에서 열린 wwA 세계레슬링 챔피언쉽 대회에서 챔피언에 오른다. 이후승승장구하여 1964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7년 제23대 WWA세계헤비급 챔피언,

1972년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 헤비급  태크챔피언에 오르는 등 3천 회가 넘는 경기에 20여차례

챔피언 방어전을 치렀다 








양파가 푸르게 자라고 있었어요 가는 곳곳 마다 많은 양파를 볼수 있었답니다






연소 화평 교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