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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고창읍성(모양성 牟陽城)

♥사랑 2020. 6. 24. 03:00

고창읍성

이 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을 막기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들어진 읍성이라고 합니다. 19654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 , 북문과 3개소의 옹성(壅) 6개소의 치성(稚)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垓)등 전략적 요충시설이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東軒), 객사(客舍) 22동의 조선시대 관아(官衙) 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진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해 오고 있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장수 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踏城) 풍속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고창읍성 축성 

고창읍성은 조선 세종 32(1450)에 전라우도인 고창, 무장, 흥덕, 옥구(군산), 용안(익산), 김제, 정읍, 고부, 태인, 영광, 장성, 진원 (장성), 함평, 제주와 전라좌도인 용담(진안),임실, 순창, 담양, 능성(화순) 19개 군현이 참여하여 3년만인 단종 원년(1453)에 완공하였다.축성당시 각 고을에서 성 쌓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쌓은 구간과 고을 이름을 성벽에 새겨두고 갔었는데 오랜 세월 지나는 동안 일부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으므로 각종 문헌과 현장조사 자료를 참고하여1997년에 고을 표석을 만들어 축성구간을 찾아 성외곽에 세워 놓았다.

공북루

이 건물은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고 배면은 화강석 돌기둥위에 둥근기둥을 세워 만든 2층 문루이다. 고창읍성에는 정문인 공북루(북문)와 등양루(동문), 진서루(서문)3개소의 성문이 있는데 성문앞에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둘러쌓고 그 위에 여장(여담)을 쌓아 성안에서 밖을 살필 수 있는 현안과 총을 쓸 수 있는 총안(근총안, 원총안)을 만들어 놓았다.공북루 전후 사적기와 상량문에는 순치 3(인조241646)병술 12월에 공북루를 소건하고 그 후 3회에 걸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안과 총을 쓸 수 있는 총안(근총안, 원총안)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196541일 사적145호로 지정되었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석성으로, 고창의 방장산(743m)을 둘러싸고 있다. 모양성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시대 때 고창 지역이 '모량부리'라 불렸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1453(조선 단종 원년)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계유년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 람이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둘레 1,684m, 높이 4~6, 면적 165,858이며, ··북의 3문과 치 6, 옹성, 수구문 2곳 등이 남아 있다.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읍성으로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고창시내 전경

동문을 정비 중에 있습니다

 

작청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작청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작청이 있었으나 고창읍성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고창여자 중학교를건립하면서 작청을 다른 곳으로 이건하여 관리소로 사용하여 오다가 1986년에 학교를 성밖으로 이전하고 확인된 자료와 고증을 거쳐 1991년도에 원 모습으로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장청

조선시대에는 왕궁과 병영과 진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현을 지키는 속오군 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과 병방 · 군교들이 군무를 보살피던 청사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장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보이지 않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1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의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지석묘

지석묘는 우리나라의 선사시대에 속하는 청동기시대 (BC4~5세기경)무덤형식 가운데 하나로 고인돌이라 고도 한다. 고창군에는 2,000여기의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창읍 죽림리 지역에만 각종 형식의 지석묘 447기가분포되어있어 1994년에 국가지정 문화재(사적 제391)로 지정되고 2000122일에세계문화유산(977)으로 지정 되었다. 이 지석묘는 죽림리 일대의 지석묘가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결정된 기념으로 제25회 모양성제(1998.10.28)날에 강호상공고 재학생200여명이 지석묘 축조과정(築造過程)을 재현(再現)하면서 만든 것이다.

풍화루

이 건물은 고창읍성 연못옆에 세운 2층 누각이다. 문헌에는 성내에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 으나 건물과 연못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8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풍화루는 1989년에, 연못은 1990년에 원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 정면에 있는 현판은 풍년과 고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풍화루라 하였는데 글씨는 석전 황욱선생이 92세에 쓴 글씨이다.

관청

관청은 관주라고도 하였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 하던곳이다. 이 곳에서는 수령과 그 가족 등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의 접대와 각종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 사무를 관장하였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관청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1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자료를 참고하여 1992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고창 객사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객사라고 하는 관아가 있었다. 중앙의 몸채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으며 왼쪽과 오른쪽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본관의 현판에 쓴 모양지관의 모양은 예로부터이 고장을 모양고을이라 하였고 이 성을 모양성이라 불러온데서 비롯된 당호이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객사가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던 것을1988년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1991년에 원모습으로 다시 지었다고합니다.

고창읍성내의 맹종죽

동헌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군, 현등 각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동헌이라 하였다. 건물 정면에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평근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동헌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1988년에 원모습으로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내아

소나무 숲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