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아기들 대부분이 엄마 등에 업혀 다녔습니다. 생김새는 물론 어감조차 촌스러우면서도 정겨운 ‘
포대기’에 폭 싸여서 말이지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고가(高價)의 유모차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엄마 등에 업혀 바라보던 세상이 우리가 처음으로 대한 세상이었습니다.
우리말 ‘없다’는 ‘업다’에서 왔다고 합니다. 가만 보면 두 말이 엇비슷합니다. 없다와 업다가 관련 있다는
우리말 ‘없다’는 ‘업다’에서 왔다고 합니다. 가만 보면 두 말이 엇비슷합니다. 없다와 업다가 관련 있다는
게 낯설게 다가오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수긍이 됩니다. 아기를 등에 업는 순간 아기에겐 엄마 얼굴이, 엄마에겐 아기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어 없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업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서로 기대고 있는 것이지요.
믿음의 길을 가다 보면 주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주님이 보이지
믿음의 길을 가다 보면 주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주님이 보이지
않으면 낙심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업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안 보이는 그때가 실은 가장 가까운 때입니다.
한희철 목사(정릉감리교회)
한희철 목사(정릉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