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쉼을 위해 제주 올레길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내일 몫까지 욕심내어 무리하게 완주했습니다. 하지만 숙소에 누워 온몸의 통증을 마주했을 때 문득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소망으로 드리는 기도는커녕 목적지에 빨리 당도하겠다는 집착으로 보낸 하루가 어쩌면 그동안 살아온 제 삶의 속도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순례자를 뜻하는 영어 필그림(pilgrim)의 어원은 ‘들판을 가로질러’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속도의 문명을 잠시 내려놓고 두 발로 대지를 밟으며, 오직 하나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이가 순례자입니다. 작가 밀란 쿤데라는 “빠름은 망각과 하나이고, 느림은 기억과 하나”라고 했습니다. 속도를 줄여야 비로소 소중한 가치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아브라함이 익숙한 터전을 떠나 길을 나선 ‘길 위의 신앙’에서 시작됐습니다. 속도에 저당 잡혀 정작 중요한 영혼의 소리를 잊은 채 살진 않나요. 잠시 속도를 줄이고 주님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이미 가득한 내면의 은혜를 기억해내는 복된 날 되시길 빕니다.
서호석 목사(광현교회)
국민일보(www.kmib.co.kr), 겨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