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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함양 한옥마을, 개평마을, 토지 촬영지, 일두고택,

♥사랑 2019. 3. 31. 02:50

함양의 중심에 위치한 개평마을은  '좌안동 우함양' 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영남지 역의 대표적 인 선비마을로 조선조 오현 중 한분인 일두 정여창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하동정씨와 풍천노씨 그리고 초계정씨 3개의 가문이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면서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일두 정여창 선생, 옥계 노진 선생 등 역사적 위상이 높은 선생을 배출하였다. 개평마을은 일두고택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비롯한 많은 전통가옥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선조들이 풍류를 즐겼던 교수정(문화재 자료 제76호) 일두선생의 명상의 장소였던 개평리소나무군락지(도기념물제254호)등 조상의 의식주와 생활풍습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자원이 많이 남아있어 민속자료로써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개평"이라는 지명은 두 개울이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에 마을 이 위치해 '낄 개()"자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두고택, 풍천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 하동정씨 고 가 오담고택 등 다양한 문화재가 숨쉬는 고을이며, 100년이 넘은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한옥이 60여채 있다

 

 

함양 개평리 하동정씨 고가(咸陽介坪里河東鄭氏古家)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61호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하동정씨 고가는 1880년에 지은 집으로서 당초 건립시에도 사대부가의 저택답게 사랑채를 비롯 한
여러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모두 훼철되고 현재의 모습만 남아 있다. 특히 안채는 남도의 특징인 일(-)자형 건물에 개방형이며, 정면 6칸 측면 1칸에 전후퇴를 두었으며, 맞배지붕에다가 부섭지붕을 하였다.건물 배치 방식에서 조선후기 남부지방 상류주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좋은 자료로 학술적 가치가 크며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며, 본 고택의 소유자인 정병조선생은 성균관대 학장과 문공부 차관을 역임였다.

 

 

 

 

 

 

 

 

 

 

관광 안내사무소

 

 

                                                             일두 고택                                

                                              지정사항 : 중요민속문화재 제186(1984.1. 10. 지정)

                                            소 재 지  :함양군 지곡면 개평길 50-13(개평리 262-1)

1450(세종 32)에 태어나 성종조에 크게 활약하다가1498년 무오사화(연산군 4)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갔다가 타게 한 일두 정여창선생의 생가지로1570년 후손에 의해 사대부가로서의 면모를 고루 갖추었. 경남지방의 대표적 인 건축물이며 개평마을을 대표하 고 있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본 고택은 TV드라마 ''의 촬영장소로 이용되면서 부터 널리 알려져 많은 문 화유적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일두 정여창선생

정여창(鄭汝昌: 1450-1504) ·()-백욱(伯勗) , ()-일두(一蠹) , 본관(本貫)-하동(河東동국 18현이며 조선 5현으로 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234향교와 9개의 서원에 제향되 어 있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 고 혼자서 학문에 힘쓰다가 이 천에서 이관의 선생에게 배우고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 의 문하에 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 하 여 체용의 학(體用) 깊이 연구하였다. 도학자인 동 시에 성리학자로서 이기론(理氣論), 심성론(心性論),선악천 리론(善惡天理論)등의 사상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 효행에 모범을 보였는데 특히 부모에 대 한 효행은 삶의 전부였다. 정치에 있어서는 사림정치를 근본으로 하는 우주관과 인간관에 기반을 둔 왕도정치(위민정치를 실현한 실천 유학자였다.

 

 

 

 

일두의 학문

일두의 학문 역사적으로 일두가 칭송되고 추앙되고 있는 근본이유는 학문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일두는 유학자로서의 기본태도인 경전이해에 철저하였다 유교의 경학체계를 새로이 인식하고 이해에 충실했던 것은 당시 조선 유학계에 선구자적 의의를 가질수 있게 하는 것이었나 일두의 학문은 심학(心學)에 근거한 이학(理學)으로 특히 중용, 대학에 정통하였다 일두는 평생 많은 저술을 하였지만, 모두 소되었고 일두유집정도가 전한다 일두의 철학사상을 볼 수 있는글로는 [이기설] . [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 . 입지론(立志論)등이 있다. 이에 의하면 이기설에서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으며. 선악천리론 에서는 선악이 모두 천리에서 나온 성()이라고 하였고, 또한 기()보다는 이를 중시 주리론자(主理論者)였다.

일두는 입지를 중시하여 입지론에서는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지행

일치의 선비세계는 지식을 높이는 학구적 태도와 그 실천능력을 고양시키는 강인한 의지의 조화 속에서기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때, 일두가 보인 학행의 정수(精髓)는 인간다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실천유학의 선구사로서 길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알수있다. 이러한 일두의 학행이 명분보다 실리를 높이고 의리보다는 변절에 유혹됨으로써 더욱 혼란 해지는 오늘의 이 사회를 향하여 하나의 정화제로 작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오늘은 아궁이  따뜻하게 불을 때고 있어요

 

 

안채

 

                                                                         안채
일두 정여창 선생의 서거 후 약 100년이 지난 뒤에 후손들이 지은 건물로서 350년이 넘었다.
사랑채가 동편을 가려 줌으로 인하여 안채의 배치 구조는 다른 건물들과 어울려져 □자형으로 되어 있다. 대청은 문중의 대소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기도하며 혹은 잔치도 열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넓게 만들었는데 남쪽 지방의 특색인 칸살이 넓고 대신에 기둥이 낮으며 대들보를 휘어진 잘생긴 나무를  천연덕스럽게 사용하여 권위보다는 구수한 기품에 친근감이 든다
안채의 오른편은 며느리 방으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남자는 뜰 아래채로 내려가서 거주하였으며 부 모중 한분이 생존할 경우에 사용하기도 하였고 툇마루  난간을 설치한 것은 혹시 발을 잘못 디뎌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진안 마이산 휴게소 입니다

 

멀리 보이는 진안 마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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