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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전주한옥마을, 오목대, 자만벽화마을

♥사랑 2019. 12. 1. 03:30

전주한옥마을 유래

전주 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발전했다.

전주에 처음 들어온 일본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1897년 이노우에와 모리나가라는 야마구치 현

출신의 두 형제가 들어왔던 것이 최초이다

 

일본인들은 주로 잡화상이나 매약상으로 활동하며 말라리아약, 회충약, 사탕, 과자, 거울, 석유,

램프 등을 취급하였습니다. 당시 외국인은 성내에 살지도 못할 뿐 아니라 좌판을 벌려서도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서문시장과 남문시장에서 행상을 하였다.

을사늑약(1905)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오목대

고려말 1380(우왕6) 9월 태조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구 아지발도의 무리를 섬멸하고(황산대첩)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조가 살았던 전주에 들러 종친들을 오목대에 모아 잔치를 베 풀고 나라를

세우겠다는 큰 포부를 담아 대풍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종사 관으로 동행하였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내심을 간파하고 만경대에 올라 비 분강개한 마음을

임금(우왕)이 계신 북쪽을 바라보며 우국시 일명 망향가(望鄕歌)를 읊었다고 전해집니다.

 

1900(광무4)에 세운 고종 친필 '태조고황 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地)'라는 비와 비각이 있으며.

전동성당이 처음 에는 여기에 들어서려 했으나 지방유림의 거센 반발로

지금의 성당자리에 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자만벽화마을

전주 한옥마을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언덕에 고즈넉이 자리한 곳이다. 승암산 능선 아래

무수히 많은 가옥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이곳은 원래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정착하면서

형성한 평범한 달동네였으나, 2012년 녹색 둘레길 사업의 일환으로 골목길 40여 채의 주택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유명해졌다고합니다.

 

골목이나 담장별로 꽃, 동화, 풍경 등을 테마로 한 다양한 스타일의 벽화들이 그려져 있어

지루하지 않게 하나하나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조용히 산책하다 보면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살았던 곳을 표시한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와 푸른 하늘과 함께 전주 시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벽화마을의 명소

 '옥상 정원'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식당도 있으며, 대략 30분 정도면 다 돌아볼 수 있다.

근처에 있는 오목대와 이목대가 있어 문화재 탐방코스로도 많은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
이목대(梨穆臺)가 위치하고 있는 이곳 자만동(滿洞)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곳이다. 고종은 조선 왕조 선대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자만동을 보호하고,

성역화하기 위해 금표(禁標)를 세워 출입을 통제하였다.

조선말기인 19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조선왕조의 정신을 읽어내는 중요한 자료이다.

 

한글길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며 대표적인 애향 예술인  효봉 여태명 교수님과 함께 훈민정음이 가지고 있는
한글의 포용성과 효율성을 가장 한국적인 도시인 전주를 상징하는 명물과 융합하여 자만벽화마을에
한글과 전주의 멋을 표현하였습니다.

 

작업 할 당시 관광객들이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으며,사람과 사람의 이름으로 연결된 각각의 상징들은
전주의 비빔밥처럼전국의 모든 지역국민들이 화합과 소통하는 어울림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목대

목조 이안사가 태어나 산성별감과의 알력으로 일가를 거느리고 전주를 떠나 삼척으로 떠나기 전에

았던 곳으로 승암산(중바위)에서 뻗어나와 이목대, 오목대 등으로 이어지는 산으로, 목조가 발산

아래에 있는 자만동(현 교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조경단을 조성한 그 이듬해인 1900목조 구거지로

전해지고 있는 자리에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우지' 라는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했다.

발산 중턱에 있었으나 기린로를 개설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합니다.

 

한 벽 당 (寒碧堂)
승암산 기술 절벽을 깎아 세운 이 누각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최담(崔)이 태종 4년(1404)에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다. 누각 아래로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데, 바위에 부딪쳐 흰 옥처럼 흩어지는

물이 시리도록 차다하여 <한벽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호남의 명승 한벽당에는 시인 묵객들이 쉴새 없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으며, 길 가던

나그네들도 이곳에서 쉬어가곤 했다. 지금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지
주변과 조화를 이룬 단아한 모습과 탁 트인 시야로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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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명승 한벽당에는 시인 묵객들이 쉴새 없이 찾아와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으며, 길 가던

나그네들도 이곳에서 쉬어가곤 했다.

 

지금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지만 주변과 조화를 이룬 단아한

모습과 탁 트인 시야로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습니다.

 

한벽굴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전주팔경의 하나였던 한벽당의  정기를 자르고 철길을 만들었다.

한벽굴은 그때 만들어진 전라선 터널이다.
1931년 10월 전주 남원간 철도가 개통되었는데,당시 전라선 철길은 이리역에서 삼례, 덕진을 거쳐
현재의 전주시청에 있던 전주역을 지나 오목대 - 이목대 - 한벽굴을 거쳐 중바위 서쪽 아래를 타고

색장동을 통과해서 남원을 향했다.한벽굴은 나들이 장소로 유명한 한벽당,

그리고 전주천 빨래터와 더불어 전주 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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