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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전주한옥마을, 경기전, 어진 박물관

♥사랑 2019. 12. 6. 03:00

경기전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건국자의 초상이며, 경기전 또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지방의 진전입니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  진전(眞殿)은 어진을 봉안한 궁전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조선은 건국 후 이를 기념해 1410(태종 10) 태조어진을 전주에 봉안하였다고합니다.

   현재의 경기전은 1614(광해군 6)에 중건한 것이다. 경기전 경내에는 진전 동편으로조선왕조실록

  을 보관하던 전주사고가 있고, 구이 태실마을에서옮겨온 예종대왕 태실이 있습니다.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태조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가 동북면 쪽으로 이주해

갈 때까지 그 선대들이 살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조선왕조는 건국 후 이를 기념해 전주에 경기전을 건립하고 여기에 태조 어진(초상화)봉안하였습니다.

경기전(慶基殿)이라는 이름은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라고한답니다.

전주는 조선왕실의 고향이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경기전을 비롯하여 조경묘와 조경단, 오목대와

이목대 등 많은 왕실 유적들이 있습니다.

정전의 한가운데 감실을 두고 여기에 태조어진을 모셔놓고 있스며, 청룡포를 입고 있는 전신상

어진으로 건국자의 위엄이 서려 있습니다. 1872년 고종 9년에 새로 모사한 어진이며, 구본은

초상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항아리에 담아 진전 북쪽에 묻었고합니다.

태조 어진을  봉안한 감실 안에는 습기와 냄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기 위해 부용향을 담은

붉은색의 향주머니를 넣어 두었다고 합니다.  감실 앞쪽에 어진을 호위하는 운검  한 쌍을 세워

두었으며 정전 좌우면으로는 용선, 봉선,홍개, 청개,등 의장물을 배치하였습니다.


태조어진의 수난과 보존

조선시대에 태조어진이 많게는 26점까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에 봉안한 태조어진이

유일합니다. 전란과 화마의 위기 속에서도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민들이 사력을

다해 수호한 결과입니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전 태조어진을조선왕조실록

함께 정읍 내장산으로 이안하여 1년간 수호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어진을 아산객사로 이안했다가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봉안하여 화를 면하였습니다.

  정해년 대화재 1767(영조 43) 정해년에는 전주에 큰 불이 일어나 민가 1천여호를 불태우고

불길이 경기전에 미치자 태조어진을 향교 명륜당으로 이안하여 화마를 피하였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는 전주성이 전란에 휩싸이자 태조어진을 위봉산성으로

이안하여 화를  면하였으며. 위봉산성은 유사시 태조어진을 수호하기 위해 숙종 때 수축한 성입니다.

예종대왕 태실 및 비

     이 태실(胎室)은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항아리에 담이 둔 석실입니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고하였는데, 이를 태실이라 합니다. 원래 선조 11(1578)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 10(1734) 다시 고쳐 세웠다고 합니다.   1928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태항아리들 가져 가면서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돌로 덮었습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 연대를 앞면과 뒷면에

각각 새겼는데, 건립연대는 선조 11(1578)이라고 합니다.

매화나무

꽃은 매화 열매는 매실이라고 하고 잎보다 꽃이 먼쟈 3~4월에 피며 향기가 좋고 아름답습니다.

7월에 익는 열매는 신맛이 강하고 식.양용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


조서왕조실록과 전주사고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사고본 실록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대부터 철종대까지 총 25방대한

역사서입니다. 실록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가 드물어 19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그 분량이 888책에 이르는 전주사고1439설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실록을 승의사 진남루 등에 보관하다가 1473년(성종 4) 경기전 동편에 실록각을 건립하고

여기에 실록을 비롯한 국가 중요서적을 보관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 태인 선비 손홍록과 안의를 비롯한 지역민들이

태조어진과 함께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겨 수호하였습니다. 내장산에서 1년간 지켜진 실록은

이후 아산, 해주, 강화도 등을 거쳐 1597년 평안도 안변의 묘항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져,

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되었다고 합니다.

전주사고본 실록만이 유일하게 보존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전기 4대 사고 중에서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의실록은 전란 중에 소실되었으나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지역민들이 사력을 다해 수호한 결과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전주는 역사지킴이의 고장입니다.

  왜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실록을 다시 출판하여 조선후기5 대사고(춘추관, 정족산사고,

오대산사고, 태백산사고, 적상산사고)에 봉안하였습니다.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후 강화도

정족산사고에 보관되었다가 현재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현존하는 어진과 역대왕들의 어진제작

   태조에서 철종대 까지 25대 임금의 초상화 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어진 뿐입니다.

종과 정조 어진은 남아 있지 않아서, 기록으로 전해자는 모습과 그 후손들의 골격을 토대로 후대에

그린 표준영정국가공인 영정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거의가 초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조선초에는 생전에 그리지 못한 경우 다음 왕대에

그렸으며, 태종은 생시에 어진이 제작되었지만,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고 하여 자신의

어진을 없애라고 하였다고합니다. 그러나 아들 세종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보존해 두었다고 합니다.

   인종은 생전에 어진을 그리지 않있을 뿐더러 그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결국 제작되지 못하였습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쫓겨난 왕으로 어진 제작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또 조선중기의 인조, 효종,

현종은 어진 제작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숙종이후부터는 어진제작이 활발해져 여러 본을 동시에 제작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 영조는 매

10년마다 어진을 그리려고 하였으며 정조 역시 3번이나 다양한 복장으로 어진을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순조의 세자였던 익종 추존 왕은 22세에 사망했음에도 예진세자의 초상의8본이나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어진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 차례 전란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도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년 창고에 불 이나 상당수가 불에 타고 말았다고 합니다.

수복청(守僕廳)

   이 곳은 경기전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낮은 직급의 벼슬아치들이 있던 곳이다.

살림집의 안채와 같은 형식이지만 주로 큰 일이 있을 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정 기간 임시로

거처하는 곳입니다.


[세계조실록세조 886일조에 의하면 전주 경기전에 수복의 수가 관노() 1, 양민(일반 백성)

18명이 교대로 지켰다고 합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수복청에는 항상 몇 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기전에서 본 전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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