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하나님께 영광을 !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안에서 이루러진것을 감사합니다

성지 순례

문준경전도사, 증도, 섬여행, 성지순례

♥사랑 2018. 9. 4. 17:30

문중경전도사 순교기념관을 방문하기위해 먼거리를 달려왔읍니다

그러나 저희 보다도 먼 파주에서 새벽 예배를 마치고 봉고로 출발하여 오신 일행 분들과 만났읍니다.

주님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니 반갑고 감사하였습니다.



문준경전도사남 순교기념관 전경


내가 진실로 녀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24절]


천사와 같은 문준경 전도사님이 기도해주시는 모습

순교자 문준경 전도자

 

 

문준경 전도사님을 죽창으로 찌른 현장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들의 능력은 당신을 죽이는 것이나

당신의 능력은 죽는것입니다.

1891년 2월2일 암태면 수곡리 출생

1927년 3월5일 목포 북교동교회 입교

1950년 10월5일 이곳에서 순교하시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시비


 우리와 같이 기념관을 관람하셨던 분들은 일정상 빨리 가시고

우리들은 기념관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식사를 무료로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좋은 신안 증도 소금 까지 사가지고 왔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님 순교비


고 문경전도사님은 섬선교의 어머니이며 성결의 신앙을 지키려는 성결교회의 상직적 인물이다.

1891년 2월 무안군( 현 신안군) 암태면 수고리에서 출생하여

1908년 3월에 현 신안군 증도면 등선리 정씨 가문으로 출가 하였다.

그후 1927년 고 이성봉 목사님이 시무하던 목포북교동교회에 입교했으며 1931년 5월 서울 성서학원

(현 서울 신학교 신학 대학교)에 입학하여 복음사역자로 첫발을 내딛는다. 1933년 임자 진리교회의

개척을 시작으로 그 이듬해인 1935년 증동리교회를 개척(1935년 부터 순교시 까지 시무햇음) 하였고

쉬지 않은 걸음으로 대초리 교회와 방축리 기도처( 현 방축리 교회)를 1936년에 개척하였으며 그 후

우전리교회와 사옥교회를 졸업한 후에도 문전도사님은 나룻배를 타고 무안군(현 신안군)의 21개 섬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 게척의 불길을 지폈다 1년에 고무신 아홉컬레사 닳아 없어 졌다는 일화는

 문전도사님이 전도를 위해 알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는지 알수 있게 한다.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예수 믿고 천국가거라"고 전도했던 아이가 지금에 예수를 믿어 권사가 되었노라고

그 때를 기억하고 있을 만큼 성령의 불을 품고 다녔던 복음 전도자 였다.

일제시대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목포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교회가 경방단(당시 일제의 후방 치안 담당기관)에 넘어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문전도사님은 6.25가 나던 그해에 증도에 들어온 공산군들에 의해 목포로 끌려가서 죽음의 고비를 맞았으나

국군의 상륙 소식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증도리로 돌아오려 하자 고 이성봉 목사님이

구약성경 이사야 26장20절 말씀인

"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가기 까지 잠깐 숨을 지어더" 는

구절을 인용하여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를 뿌리친째 비록 제가 죽을 지언정 저 한사람 때문에 무고한

우리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타고 갔던 풍선(돛단배)를 다시 되잡아타고

증도리로 돌아왔다. 그후 1950년 10월4일 저녁에 공산군들이 다시 지도로 압송한다고 하며

여기 모래 사장으로 끌고 왔다. 사형장인 모래 사장에 문전도사님과 함께 포승줄에

묵여 끄려 갔다 극적으로 탈출한 생존자 김두학 장로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공산군으 1950년 10월5일 새벽3시 새끼줄에 묶인채 문전도사님을 이곳으로 끌고온 후 죽창으로

찌르고 발길로 차며 총대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후려 치고 있었다 그와중에도 문전도사님은

"나는 죽이더라도 백정희전도사와 성도들은 죽이지 말라" 고 간청하였다.

모래시장에 끌려온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군은 너는 반동의 씨암닭 같은 존재이기에 처형한다 며

 문전도사님을 창으로 잔인하게 온 몸을 찔렀지만 숨이 끊어지지 않자

숨통을 끊는다고 하며 목에다 총구를 대고 총살하였다

순교한지 며칠이 지난 뒤에도 공산군이 두려워 시신수습도 하지 못하고 있으르때

지금도 생존에 있는 박복염권사의 증언을 들으면 "터진목에서 백정희 전도사님과 조동례권사,

정삼용씨, 조행선씨 나와 같이 다섯 솔부등으로 옮겨 물을 떠다가 시신을 씻기면서 보니온몸이

피로 물들어 버선 까지 피 범벅이 되고 피부가 벗겨졌었다" 고 말한다.

이처럼 성도들의 신앙을 지키다가 공산군의 총탄에 맞아 순교하고 복음전도와 헌신의 삶을

오는 세대에 물려 주었다. 당신이 못다한 사역은 남은 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것이다.

순교한지 1년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솔무등에다가 매장 했다가 이듬해 2월 호남지방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니 그 당시를 회상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추모 인파가 인산 인해를 이루었던 장례식이었으니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행렬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사역 중에는 모든이의 어머니였고,

 산모들에게는 산파였으며 한숨짓는 가정에 가서는 찬송으로 위로 하였는데 천국가와 허사사를 불러

소망을 심었으니, 이를 들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다.

문전도사님의 거룩하고 순결한 순교의 뜻을 이어 받아 그렇게 한알의 밀알되어

뿌려 놓은 믿음의 씨앗들이 오늘날 수 많은 열매로 맺혔다.

당신께 사랑의 큰 빚을 진 모든 이들이 그뜻을 기리며 여기 기념비를 세운다.

"순교의 아름답고 숭고한 꽃이여 영원하리라"

추모 예배일 매년 3월 11일

주후 2003년 5월1일


여기 도서의 영혼을  사랑하시던 문준경전도사님이 누어계신 곳

증도 안내도

아름다운섬 증도 구경 잘 하세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증도가 멋을 내어 봅니다

아름답게 벗 꽃이 피었습니다.

유채꽃도 나도 환영 한다고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증도는 스로시티로 지정되었었요. 자연을 그대로 보전되고,

현대를 보다 천천히 살아 가자는 ~~~~




증도에서 가볼만한곳 2위 인가 봐요

아주 멋있어요


짱둥에 다리를 걸으며 바다를 바라보면 마음이 바다 처럼 넓어지면 좋겠어요


둥어 다리에서 쉬었어요.


신안군 사옥도와 증도와의 다리인 증도 대교

이 증도대교가 없으면 배를 타고 다녀야 해요



여기서 부터

국도 24호선 (신안 - 울산)이 시작됩니다